누구나 죽을 권리가 있다?
시인 엘리어트의 장시 <황무지>에는 불멸의 삶을 허락 받은 무녀가 등장한다. 그녀는 영생을 얻었지만 추하게 늙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누군가 당신의 소원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무녀는 간절하게 대답한다. "죽고 싶어."
라캉은 "인간은 욕망 하는 존재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곧 죽음이다"라고 말했다. 리비도가 인간 욕망의 핵심이라고 말하던 프로이드도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죽음의 본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보다 못한 삶이라고 생각될 때, 살아있는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 자살을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을 넘길 때까지 한 두 번 이상 죽음의 유혹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다. 지금까지 두 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고, 당연하게도 미수에 그쳤기 때문에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한동안 너무나 강렬하게 죽음의 유혹에 사로잡혀서, 나는 죽어있는 내 몸을 보기도 했었다.
인터넷 자살 사이트가 문제가 되고 있다. 생명은 물론 소중한 것이다. 자살 사이트 운영자들은 매도되어야 마땅하지만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그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볼 줄 알아야 한다.
안락사 법안이 네덜란드 하원을 통과했다. 안락사를 인간의 권리로 인정하고 법으로 명문화한 것은 세계 최초이다. 안락사란, 의사가 환자의 요청에 따라 생명연장 기구를 제거하거나 고통을 완화하는 약을 제공함으로써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세계의 각 나라마다 안락사에 대한 태도는 다르지만 법적으로 그것을 허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그만큼 격렬한 윤리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미국 미시건주에서 일어난 잭 케보키언 사건은 안락사 논쟁의 대표적 사건이다. 그는 130여명의 말기 환자들이 안락사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법원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 실형을 선고하였다. 안락사는 또 환자 때문에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 가족에게 악용될 우려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희망 없는 환자들을 고통 없이 죽게 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환자와 가족을 위하는 길이 아닌가 하는 반론도 있었다.
안락사와 자살 사이트를 통한 청부자살은 다르다. 그러나 사회공동체 모두가, 죽음을 원하는 그들의 마음이 되어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의 생명이니까 자신의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풀 한 포기, 개미 하나에 이르기까지 생명 이상으로 소중한 것은 없다. 문제는 그 소중한 생명이 아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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