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기대와 우려와 호기심을 낳았던 ‘데이빗 게픈 갤러리’(David Geffen Gallery)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공식 개관일은 5월4일이지만, 지난 15일 언론에 처음 공개한 데 이어 19일부터 거의 매일 라크마(LACMA) 멤버들과 후원자들을 위한 프리뷰와 리셉션이 계속되고 있어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상당수가 다녀온 듯하다.
7억2,400만달러를 들여 지은 이 거대한 콘크리트 건축물과 첫 전시에 대한 평가는 칭찬 일색이다. LA타임스와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미디어들은 기사와 비평, 건축가(피터 줌토르) 인터뷰, 전시작품 소개, 관람 팁 등의 스토리를 통해 찬사를 보내고 있다, 기사제목들만 보아도 ‘대범한’ ‘거대한’ ‘황홀한’ ‘눈이 튀어나오게’ ‘깜짝 놀랄’ 등등 예상을 뛰어넘는 감동이 전해진다. 지난 10년 동안 엄청난 반대와 논란이 계속됐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처럼 180도 달라진 격찬들은 놀라울 정도, 물론 그만큼 건축물과 갤러리의 완성도가 기대를 뛰어넘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윌셔 대로를 가로지르는 곡선형의 콘크리트구조물이 7개의 거대한 기둥에 떠받쳐져 9미터 높이로 솟아있다. 축구장 3개 크기(11만 스퀘어피트)에 달하는 갤러리 공간은 단일 층으로 길고 넓게 펼쳐져있다. 그 안에 80개가 넘는 방이 있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수없이 많은 벽과 복도들이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다양한 공간에 2,000여점의 소장품들이 전시돼있다.
데이빗 게픈 갤러리의 가장 큰 특징은 ‘위계질서(hierarchy)가 없다’는 것이다. 단층이라 위아래가 없고, 곡선이라 앞과 뒤가 없으며, 입구조차 시작과 끝을 배제하고 있어서 모든 예술작품이 한 무대에서 수평적이고 동등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시방식도 파격적이다. 연대순이나 나라별이 아니라 주제별로 전시를 구성함으로써 서로 상이한 배경의 작품들을 함께 배치했다. 말하자면 고대그리스 조각과 현대작품, 고전명화와 페르시아 카펫, 의상과 자동차, 사진과 섬유예술 등 여러 시대, 여러 나라에서 제작된 미술품을 같은 평면에 배치하여 그야말로 계급 없는 평등한 전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대형 뮤지엄에서 처음 시도하는 혁신적인 방식이다. 세계의 모든 박물관은 시대별, 지역별, 문화적 배경에 따라 소장품을 분류하고 전시한다. 그것이 관람자의 이해를 돕고, 부서별 연구와 작업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라크마도 과거엔 이 방식을 따랐다.
하지만 마이클 고반 관장은 2006년 라크마에 부임하자마자 줌토르와 새 건축을 계획하면서부터 이 틀을 타파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21세기에 걸맞는 박물관, 장르와 재료와 지역을 초월한 예술,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양하게 소통하는 글로벌 전시를 꿈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혁신적 아이디어가 많은 비난을 불러왔다. 시대적 기준이 없는 전시라니, 얼마나 혼란스러울 것인가….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혼란의 전시’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를 읽는 ‘첨단의 전시’라는 평가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선입견과 관습을 벗어버리자 놀라운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데이빗 게픈 갤러리는 위계와 질서가 없는 만큼 전시 관람에 정해진 순서나 동선도 없다. 방문객들은 자유롭게 거니는 것이 장려된다. 발길 가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둘러보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우연한 발견에 놀라기도 하면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건물이 아메바 형태의 곡선이고, 곳곳에 수많은 방들이 연결돼있어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이 갤러리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라크마가 새 갤러리를 위해 제작한 두툼한 안내책자의 제목이 ‘방랑’(Wander)인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60개의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여는 입구에서 만나는 안내문은 “호기심을 나침반 삼아 자신만의 길을 탐험하라”고 부추긴다.
데이빗 게픈 갤러리를 두시간 넘게 돌아보며 개인적으로 감동을 느낀 부분은 콘크리트의 아름다움이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에서도 보았던 노출 콘크리트의 거친 텍스처, 육중한 거석의 덩어리감이 주는 장엄한 아름다움이 눈앞에 서있었다.
줌토르는 콘크리트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는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건물은 현대 건축계를 특징짓는 ‘매끈한’ 건축에 대한 거부라고 말했다. 유럽적인 세련됨과 디테일이 아니라, 적당히 거칠고 투박하고 솔직한 미국적 디테일을 원했으며, 그것이 자랑스럽다고 강조했다.
이 건축물의 표면은 수백 명의 장인들이 진흙 같은 콘크리트 혼합물을 안팎으로 수작업으로 바른 결과물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 또한 그대로 내보인다고 설명한 줌토르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련됨이 아니라 손에서 나오는 진심 어린 직접성”이라고 했다.
화려하고 세련된 박물관이 넘쳐나는 시대에 라크마는 불완전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건물, 도전적이고 변화무쌍하며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 건물을 지었다.
매끄럽고 반짝이는 건축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날 것의 기품’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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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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