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눈이 왔네!”
나이 오십이 넘은 사람이 새벽에 한 첫 마디 치고는 좀 유치하다. 눈이 왔으니 어쩌란 말인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뒷머리가 근질거리는 것 같아 작업실로 숨는다.
뉴욕의 멋쟁이 건축물과 개성 강한 모양의 자동차 그리고 아름들이 가로수에 묵직히 펼쳐진 새하얀 세상은 무명을 나르는 실꼬지처럼 길게 부풀은 전기줄과 어울려 동화의 세계로 몰입시킨다.
개인전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을 달랠 겸 창문에 매달려 하얀 세상과 캔버스를 번갈아 보지만 두 개의 새 하얀 세상은 상념의 세계를 넘나든다.
흑백이 강력해진 명도의 대비에 선뜻 화면 위로 옮기지도 못하고 주저하는 것은 순수함의 결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창밖의 흰 눈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는 어떤 공백의 더 두려운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느끼는 백색의 공포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순백의 힘, 하얗게 다가오는 캔버스의 위압감 때문에 가위에 눌려 허우적거리듯 마냥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20년을 넘게 느끼는 두려움이며 항상 마음 두근거림으로 기다려지는 만남의 시간이기도 하다.
흰색이란 창조할 수 있는 무한한 힘이 담겨있는 근원이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바탕을 하얗게 준비해 놓고 난 다음부터일 것이다.
꼭 인과응보가 아니더라도 원인으로 인한 결과야 빛과 그림자 만큼이나 당연한 것처럼 우리의 살림살이도 다를 바 없다. 준비 없이 되는 일이 없다.
무엇을 어떻게 왜 그릴 것인지, 또 무엇으로 표현하는 사고와 자료의 적절한 접합만이 비로소 진실을 새롭게 창출시켜 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준비 없이 덜렁거리는 스스로가 두렵다. “어! 눈이 왔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유치하단 말이다. 결국은 두려움을 떨쳐버리려 돌아보는 현실은 더 참담한 미지의 세계이지만...
하얀색은 무채색이다. 무채색이란 색상을 갖지 않았다는 말이다. 단순한 명도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채색의 혼합을 극대화한 것이지 결코 색이 없다는 것이아니다. 즉 빨강과 파랑을 섞어서 보라색을 만들고 녹색과 노랑을 섞어서 연두색을 얻을 수 있되 이것을 한꺼번에 섞어 버린다면 거무칙칙한 색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듯이 조심스럽게 풀어내어 경이로운 색들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찮은 돌덩이에서 금이나 옥을 얻듯이..
흰 눈으로 꽉 채운 이 겨울, 추위가 매섭게 몰아쳐 우리를 붙잡아 세운다 해도 봄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하얀 캔버스에 그려질 한없는 기대감 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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