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문인들을 따라 프레즈노 인근의 리들리 마을로 향하는 길이었다. 새벽 다섯 시에 출발한 터라 컴컴한 주변과 안개마저 낀 날씨로 차창 밖은 별 구경거리가 없었다.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바라며 5번 프리웨이에서 99번 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맑은 경치가 눈앞에 펼쳐졌다. 눈부신 아침 햇살과 더불어 가슴이 확 트이도록 넓은 들판, 눈 덮인 산, 양떼와 소떼들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솔솔 풍겨오는 거름냄새조차도 정다웠다. 무엇보다도 끝없이 펼쳐 있는 과수원의 분홍과 흰 꽃의 물결은 환상이었다.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에 관계하게 된 선배 문인이 이민역사의 현장을 견학하러 리들리 마을에 들른 것은 지난 1월이었다. 하와이의 사탕수수밭과 더불어 프레즈노 부근의 농장들은 이민 1세들이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2세와 3세 모두 대도시로 나가서 한인은 줄었다고 했다. 이민 1세들이 부지런하고 좋은 본을 보였던 모양인지 시립박물관에 꽤 큰 면적을 한국관으로 배정 받았단다. 애국심 많은 두 분의 지역 주민이 주동이 되어 한국관을 꾸며보려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영사관과 한국문화원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다며 애태우는 것을 선배가 보고 돕기로 한 것이었다. 선배는 두 달여를 이곳저곳 수소문하여 병풍과 금관모형을 비롯해 한국의 생활용품을 150여점 수집했다. 우리 집의 자개 보석함과 태극부채, 결혼 때 받은 노리개도 보태졌다.
진열을 거든 후 초기 이민자들이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에 들렀다. 이름만으로는 아쉬웠는지 그들은 묘비에 ‘대한국인’ 이라거나 ‘서울생’ 혹은 ‘경기도 인천생’ 또는 ‘경상남도생’하며 고향을 표시해 놓았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고국과 고향에 대한 애착이 아닐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들이 세운 옛 한국인 교회 터엔 오래된 한국 무궁화 한 그루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100년전 한국의 이민 선배들과 일면식도 없는 낯선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로 연결되고 있는 것인가. 나무를 구해 심던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한국말이 서툰 송스 농장의 주인명함엔 아버지 적부터 쓰고 있다는 로고가 새겨 있었다. 한복 입은 장구치는 여인의 그림이었다. 흔한 그림도 경우에 따라 가슴 저리는 감동을 줄 수 있음을 느꼈다.
뜻 있는 행사에 동행하는 것 외에 덤으로 바람이나 쏘이려고 가볍게 따라 나선 길이었지만 생각 밖의 깨우침이 있었다. 이 곳에 오래 살면서 아무리 미국화된 척 선진국민인 척 해도 나는 여전히 한국인임을 부인 할 수 없다는 것. 미국시민권을 가졌다 한들 증명서로는 설명 못할 한국인의 뜨거운 피로 민족끼리는 통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서울 촌놈 주제에 과수원에 만발한 흰 꽃이 배꽃이라고 우겼었다. 알아보니 자두 꽃이었다. 분홍색 바다를 이룬 꽃의 대부분은 복숭아의 일종인 넥타린 꽃이라고 했다. 한국의 털복숭아와 미국의 살구가 접목되어 생긴 이민 2세인 매끈한 복숭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 넥타린이 오래 전 이곳 한인 농장인 킴브라더스 팜의 개발품이었다는 것도 처음 들었다. 넥타린으로 거부가 된 킴스 농장 주인은 어려운 이웃과 유학생들을 많이 도와준 이민 모범생이었다고 현지에서 만난 이들은 입을 모은다. 이민 100주년을 맞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진작에 보여준 선각자가 아닐 수 없다.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 조국의 어려움에 기꺼이 힘을 모으고, 몸담고 사는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여력이 있는 한 주위 사람을 돕고 산 이민선배들로부터 성숙한 이민자의 태도를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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