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대우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와 함께 한 때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책이다. 둘 다 재벌 총수가 쓴 자서전적 회고록이면서 두 사람의 경영 철학과 수많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어 지금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정회장 책에 보면 ‘빈대의 교훈’ 이야기가 나온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수없이 가출했다 잡혀온 후 다시 집을 뛰쳐나가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할 때 일이다. 노동자들의 땀 냄새와 고린내가 진동하는 합숙소는 지금 수준으로 보면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보다 노동자들을 괴롭힌 것은 수없이 날뛰며 피를 빠는 빈대들이었다.
당시 막노동자이던 정주영은 꾀를 내 밥상 위에 올라가 잤다. 뜸한 것도 잠깐, 이내 빈대가 밥상 다리로 기어 올라와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를 막기 위해 밥상 다리를 물 담은 그릇에 담아놨다. 그런데도 빈대들은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뛰어내려 물어뜯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었다. 하찮은 빈대도 그토록 노력해서 뜻을 이루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은 평생 그의 좌우명이 됐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책제목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1952년 겨울 아이젠하워 한국 방문을 앞두고 유엔군이 묘지를 파란 잔디로 단장해달라고 부탁하자 새파란 겨울 보리를 옮겨 심어 해결한 일이나 현대 조선소 건립 당시 영국 은행이 론을 해주지 않자 500원짜리 지폐에 나온 거북선을 보여주며 한국 조선술의 우수성을 설명한 후 승낙을 받아낸 일등등이 모두 그의 ‘하면 된다’ 철학의 소산이다.
해방 후 지난 50여년간 한국 경제 발전에 누구 못지 않게 큰 업적을 남긴 정주영 회장이 21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11만 ‘현대’인들 위에서 ‘왕회장’으로 군림하던 그의 죽음은 재벌 총수 1인 경영체제가 주도한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현대 자동차는 이미 떨어져 나갔고 나머지 수십개 계열사들도 5개 그룹 정도로 나뉘어져 재벌 현대는 사실상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밀어 부치기식 경영은 한국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일인독재의 폐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했다.
그의 책 제목과는 달리 말년에는 92년 대선에 출마했다 참패하자 “나 같은 사람이 됐으면 큰 일 날 뻔했다”고 몸을 굽히고 현대의 재정난으로 선산처럼 아끼던 서산농장을 내놓는가 하면 후계구도를 마무리짓지 못해 ‘왕자의 난’을 초래하는등 많은 좌절을 겪었다. 어찌 됐든 한국 경제사에 큰 족적을 남긴 ‘왕회장’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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