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칼럼-세상사는 이야기
▶ 백재욱 <리맥스100부동산 대표>
"금년부터 삼재시래요. 각별히 조심하세요"
정초 지나고 얼마 안됐을 때 H로부터 걱정 어린 전화를 받았다. 얘기인 즉슨 신사년 올해는 토끼, 양, 돼지띠에게 삼재가 시작된다는 것. 내가 뭘 잘못하지 않아도 관재나 구설, 차사고 같은 것에 휘말릴 수가 생긴단다. 정확히는 몰라도, H의 남편이 수산업을 하니까 뭘 보러 갔다가 들었던가 보다.
고맙다 싶어 예, 조심하고 살께요 대답은 했지만 별로 주눅 드는 마음은 없었다. 인생이란 게 원래 길흉화복의 끝없는 조합이니까. 그리곤 보름쯤 지났나? 회사 빌딩 주차장 관리실에서 연락이 왔다. 누가 뒤로 빼다가 파킹돼 있던 내 차를 받았으니 나와 보란다. ‘아, 이거였어? 오케이’하면서 나가보니, 말 안해 줬으면 나같은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지나쳤을 만큼 차 앞 펜더 구석이 약간 벌어져 있다. 이런 식으로 차가 긁히고 상채기 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아무도 안 다쳤으면 됐지. 속이 이상하게 편안해지면서 ‘자, 한 개는 지나갔군’하고 손가락 하나를 꼽았다.
사흘 뒤엔 수술을 받았다. 정기 검진하러 갔을 때 어깨 아래로 뭔가가 수상하다더니 배양결과가 수술을 하는 편이 좋겠다로 나왔던 것이다. 중한 수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복기가 한 달은 걸렸다. 이렇게 해서 쉬어보는 거지 언제 또 이 고단한 몸을 호사시켜 볼 것인가. 햇볕 잘 드는 창가, 침대에 누워 봄을 준비하는 나무를 실컷 구경했다. 손가락 두 개를 꼽았다.
비교적 평온히 몇 주가 흘렀다. 출근할 때 깜박 잊은 게 있어서 다시 집에 들렀다 약속 장소로 떠나려는데 집밖에 내다놓은 쓰레기통에 저게 뭐지? 뚜껑이 안 닫힐 만큼 커다란 쓰레기 봉투가 시커멓게 꽂혀 있다. 아침까지도 없었는데… 마침 비닐봉지 끝이 열려 있어 빼꼼 들여다보니 에그머니나 세상에, 누가 위조지폐를 만들어보려고 연습했던 갖가지 가짜 돈들이 한가득 들어있는 것이다. 5불, 10불, 20불, 50불, 뭐 좀 쓸만한 것 없나하고 이리저리 뒤척여본들 그럴싸한 건 이미 이 불법 예술가가 빼돌렸겠지 내 차례가 올 것인가.
결국 서둘러 나가려던 채비는 밀쳐 둔 채 비밀수사대에 신고를 하니, 쓰레기통 옆에 꼭 지켜 서서 기다리라고 한다. 30분도 넘게 꽃샘 바람 속에 떨고 있노라니 또 손가락 하나가 꼽혀진다. 그래 차사고랬지? 건강 조심하랬지? 구설에 관재수가 있겠다고? 와라 와. 3잰지 뭔지야. 우리가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준비하고 피해서 돌아가려 해도 문득 그 앞을 막아서는, 운명이란 이름의 것들아. 삶이라는 덤불 속에 갈피갈피 숨겨져 있다가 튀어나오는, 비밀의 복병들아. 어느 해인들 예기치 않고 원치 않던 일들이 없었더냐. 또, 그 일들로 해서 우리가 영원히 거꾸러져 절.망.이라고 마침표 찍고 무릎 꺾었더냐.
돼지·토끼·양의 삼재가 올해로 첫 해라면 내년은 또 어떤 세 가지 동물에게 삼재의 첫해가 떨어질 것이며, 어느 해인들 온전하게 열두 가지 띠가 아무 덫에도 안 걸리는 삶이 있겠니? 그렇다면 그게 과연 ‘살아있는 날’이라 할 수 있겠니?
검은 양복을 입은 수사대 요원들이 나타난 것은 45분쯤 후. 황금별 배지를 내 앞에 하나씩 펼쳐 보이며 건네주는 명함에는 ‘Secret Agent’라는 글자가 박혀 있다. 끝도 없는 질문과 진술. 급기야는 내 집안까지 구두신고 들어와 컴퓨터와 스캐너를 체크하고 결국 쓰레기 봉지를 신주 다루듯 조심조심 차에 실으며 악수를 청한다. 고맙다고, 이상한 일 있으면 연락 달라고.
내 손님과의 약속시간은 이미 3시간이 지났다. 난 짜증도 안 나고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려 한다. 앞으로 3년간 닥쳐올 것이라는 재난들아. 너희도 방탄조끼의 그 사나이들처럼 내게 네 신분을 차례차례 밝히겠지? 내게서 모든 대답을 유도해 내겠지? 그리고 일단은 더 이상 상관할 일이 없다싶으면 떠나며 악수를 청하겠지? 필요하면 다시 연락할 테니 협조해 달라고. 그래 나도 너희에게 손 내밀며 부탁하련다. 자 한 수 가르쳐다오. 쓰고도 시다는 인생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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