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을 방문해서 시장에 들렀던 길에 우선‘붉은 악마’T셔츠부터 몇 장 샀다. 위대한 민족 대단합의 상징을 길이길이 보존하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지난 주 시애틀에 돌아와 친지 몇 분에게 T셔츠를 선물로 줬더니 모두들 귀한 물건이라며 좋아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튿날 이들로부터 볼멘 소리를 들어야 했다. T셔츠 사이즈가 분명히 XL(特大)로 돼 있는데 미디움(중간)보다도 작아 입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제는 더 심하게 불평하는 사람이 있었다. T셔츠를 빨았더니 빨간 물이 빠져 다른 빨래까지 버렸다는 것이었다. 놀랐다기보다 충격적이었다. 한 달도 못 가는 민족 자긍심이라니? 서울서 온 아는 교환교수에게 한국인의 상도의가 아직도 이 모양이냐고 따지니 유구무언일 뿐이었다.
그 동안 밀린 신문을 대충 훑어보니 본국 사람들만 흉볼 게 아니었다.‘우수한 한인’의 이미지에 먹칠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를 조작해 보험금을 타낸 한인사회 최대규모의 사기단 적발, 할머니를 상습 폭행해 노약자 상해 혐의로 체포된 손자, 매춘여성을 감금 협박한 데이팅 서비스 업주 등의 얘기가 대문짝 만하게 실려 있었다.
미국 내 한인 수를 약 2백만명으로 추산할 경우, 이는 전라북도의 전체 인구가 미국에 옮겨와서 사는 셈이 된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이민조상 때(1903)부터 지난 100년간 놀라운 양적 성장을 이뤘다. 한미연합회는 2000년 센서스 자료를 근거로 한인 2세들의 학력이 타민족에 비해 높고 이들의 중간 소득액이 7만달러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러나 한인이민사회의 질적 성장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다. 한인들이 주류사회서 주도권을 갖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찬사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인들이 주인의식을 갖지 목하고, 리더십을 행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의식 내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끼리끼리만 살며 대외적으로 커뮤니티의 지위 향상에 소홀했기 때문이 아닐까?
다른 민족들의 미국 이민 및 주류사회 동화과정은 각양각색이다. 중국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철저히 모여 살면서 주류사회에 동화하지 못했지만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했고, 일본인들은 한동안 함께 모여 살아왔으나 3~4 세대가 지나자 주류사회에 거의 완전 동화됐다. 유대인들은 중국인과 일본인의 장점을 두루 수용했다. 주류사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유대교를 통해 전통문화와 민족 정체성을 훌륭하게 유지하고 있다.
유대인 커뮤니티는 그 규모가 5백만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난 대선의 민주당 부통령 후보 조지프 리버먼 등 10명의 상원의원, 27명의 하원의원, 7명의 각료를 배출하며 정치는 물론 경제·과학·법조·언론계를 좌지우지하는 이민집단으로 자리를 굳혔다. 유대인들의 성공비결은 ▲미국이‘기회의 땅’임을 잊지 않는다 ▲미국 땅에서 희생자가 아닌 주인으로‘새로운 조국’을 건설한다 ▲정치에 직접 참여한다 ▲기부금을 의무적으로 낸다 ▲커뮤니티를 통해 이슈마다 목소리를 낸다 ▲2세들에게 종교와 역사를 전수한다 등 5가지로 요약된다.
특별히 어려운 비결도 아니건만 한인사회는 그동안 이들을 본받지 않고 방향감각 없이 표류해왔다. 한국축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하자 우리 한인은 벅찬 환희를 만끽했다. 우쭐한 기분으로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미국 땅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새로운 조국을 건설한다는 도전의식 없이는 유대인의 성공사례를 우리 것으로 만들 수가 없다.
‘붉은 악마’의 함성에서 이어지는‘의식혁명’이 현재 진행중이라고 믿고 싶다. 나만의 환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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