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장례식에서의 일이다. 레이건이 부시(W. 부시의 아버지)와 만났는데도 모른 척 하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부시가 다가가 인사하자 레이건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인사 받는 것처럼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부시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레이건의 냉담함에 부시가 섭섭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섭섭함은 오해였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94년 11월 레이건은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제야 부시는 "아, 그때 그래서 그랬군" 하고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주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78)이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음을 밝혔다. 그런데 이 성명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눈물겨운 표현이 있다.
"만일 내가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을 몰라보거나 동문서답하면 그냥 웃어 넘겨주기 바란다. 당신은 알 것이다. 내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를."
찰턴 헤스턴이 이와 같은 성명을 발표하자 낸시 레이건이 그의 가족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 가족은 그 끔찍한 병의 잔인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힘겨운 하루 하루를 맞게 될 헤스턴 가족과 특히 부인 리디아에게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짧은 내용이지만 낸시 레이건의 편지는 구구절절 알츠하이머 환자 간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그 끔찍한 병의 잔인함을""힘겨운 하루하루" "부인 리디아에게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등의 구절은 이 편지가 손으로 쓴 글이 아니라 마음으로 쓴 글임을 느낄 수 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요즘 부인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라고 미국 신문들이 보도하고 있다. 그 정도면 알츠하이머 말기에 속한다.
알츠하이머병은 의학적으로 수십억개의 뇌의 세포가 하나씩 죽어 가는 것을 말한다. 기억력이 없어지는 병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알츠하이머는 ‘자식과 부모의 정을 떼는 병’ ‘인간의 위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병’이다. 쉽게 말해 스타일을 있는 대로 다 구기고 내 주위사람과 정을 다 끊고 죽는 병이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앞에서 옷을 벗는다면 어떻게 될까. 장모가 놀러온 손자들에게 귀찮다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야단치면 어떻게 될까. 위문심방 온 목사님에게 "나는 이제부터 예수 안 믿을 테니 우리 집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소리치면 어떻게 될까.
알츠하이머병의 증상은 맨 처음 성격변화로부터 시작된다. 별 것 아닌 일에 화를 내고, 뭐가 잘못되면 모두 남의 탓이고, 누가 자기를 욕하고 다닌다느니 하면서 험담하는 등 항상 뭐가 불만이다. 이 때 가족이 눈치채야 되는데 대부분 ‘좀 성격이 이상해졌다’는 식으로 생각하며 말다툼을 벌인다.
다음 단계에서는 돈 계산이 틀리고 샤핑 습관이 이상해진다. 예를 들면 20달러주고 커피를 사 먹은 후 잔돈 받는 것을 잊어버린다. 맥도널드를 샀다하면 20개씩 사들고 들어온다. 페이먼트를 잊어버려 전화를 끊겠다는 연락이 오는가 하면 음식점에 가서 밥 먹은 후 돈을 안내고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가출하여 거리를 헤매거나 대소변을 못 가리는 단계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 8~10년 후 사망한다. 그러니 그동안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란 표현하기 힘들 정도고 나중에는 누가 간호를 맡느냐를 둘러싸고 형제간에 싸움이 일어난다. 결국 요양원에 보내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마련이고 "증상이 심해졌을 때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후회할 때는 너무 늦다. 환자도 요양원에 들어가면 마음 편해하고 증세도 호전된다.
"당신이 알츠하이머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누가 물을지도 모른다. 우리 가족 어른 중에 한 분이 알츠하이머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기억이 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낸시 여사가 말한 그 "끔찍한 병의 잔인함"을 피부로 느끼는 사람 중의 하나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알츠하이머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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