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혹시나 본국인들이 수해를 겪지 않고 넘기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물난리도 보통 물난리가 아니라 한민족 사상 최악의 물난리를 겪고 있다는 소식이다.
장마철을 다 보낸 뒤 추석을 3주 앞두고 한반도를 엄습한 태풍 루사는 미국의 9·11에 버금가는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인명피해만 2백명이 훨씬 넘었다. 산사태로 졸지에 온 가족을 생매장 당한 가장도 있었다. 재산피해는 추산조차 어려운 형편이다. 피해가 가장 심했던 강원도 지역에서는 수확을 눈앞에 뒀던 농작물들이 표토가 휩쓸려 내려가는 바람에 허사가 되고 말았
다. 앞으로 3~5년은 지나야 다시 그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많은 농촌 주민들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고 홀로 농토를 지켜온 촌로들은 이미 대부분 자식들에 이끌려 고향을 등졌다고 한다. 수십년의 땀이 밴 옥토가 자갈밭으로 변하자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한 농부도 있다고 한다.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본국에서 대대적으로 수재민 돕기 성금 운동이 벌
어지고 있다. 각 신문마다 2면에 성금 기탁자 명단이 실린다. 신문협회는 피해가 예상보다 너무 커지자 9일로 마감하려던 모금 운동을 말일까지 연기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한국 정부는 4조 1천억원의 추가경정 예산을 편성하는 등 총 6조원에 이르는 돈을 수재 복구를 위해 쏟아 붓기로 했다. 나라 형편이 옛날보다 훨씬 좋아져서 스스로 미증유의 물난리를 겪으면서도 북한에 원조하기로 한 쌀은 약속대로 보낸다는 소식도 들린다.
시애틀 한인사회에서도 본국 수재민 돕기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한인회가 캠페인을 주도한다는 점이 예년과 다르다. 성금 창구를 두 지역 한인회로 일원화하기로 한 최근 한인사회 단체장 회의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한인사회의 대표기관이 한인사회의 모금운동을 주도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명분이다. 실제로 타코마 한인회는 대한부인회와 합동으로 지난 7일 한나절 한국식품점 앞에서 모금운동을 벌여 2천달러 가까이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언론사들도 한인회 캠페인을 지원하거나 독자적으로 모금운동을 벌인다. 따지고 보면 창구 일원화가 꼭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성금을 내는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창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캠페인 성과도 커지기 때문이다. 미국사회에서도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순직할 경우 유가족 돕기 성금구좌를 언론사들이 앞장서서 알려주고 있다. 본국에서도 언론사들이 마치 사세를 경쟁하듯 성금을 모으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
본국에 살든 미국에 살든, 한인들은 본래 정이 많은 민족이다. 남을 도와주는 것을 큰 덕목으로 삼는다.‘십시일반’이라는 말이 흔히 쓰일 정도로 어려운 이웃돕기가 생활화돼 있다. 해마다 연말연시에 한국일보 시애틀지사가 벌이는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에는 익명으로 성금을 보내오는 독지가들이 많다고 들었다. 성경도 선행은 남모르게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한국이 잘살게 됐다지만 어려운 사람은 여전히 어렵다. 시애틀의 한 한인단체는 아직까지도 한국의 소년가장들을 돕고 있다. 남가주의 한 단체는 한국의 불우아동들을 위해 해마다 30만달러 가량을 모아 보내고 있다. 근래 한국경제가 발전하면서 일부 졸부들 사이에 재미교포를‘재미 고포(苦胞’)로 부른다는 말도 있지만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누가 뭐래도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해마다 수해 걱정 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기 때문이다.
성금은 원래 한 사람이 한 술씩만 거두면 한 사람 분의 식사가 마련된다는 십시일반의 정신에서 비롯돼야 한다. 성금은 액수보다 정성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9·11 일주년을 맞아 9·11에 버금가는 피해를 입은 본국인들에 도움의 손길을 펼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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