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코미디 황제’ 이주일의 삶과 영욕이 우리 가슴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주일 신드롬‘의 요체는 무엇일까. 이는 단순하게 ‘정말로 웃겨주는’ 한 코미디언의 삶에 대한 경외의 차원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어 보인다.
그 배경에는 ‘잘난 것’ 하나 없는 이가 사회의 유리천장(glass ceiling),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통타해 낸 삶 자체를 통쾌함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호응이 결부되어 있는 것일 게다. 미국사회에도 이런 ‘이주일 신드롬‘ 같은 대중적 공감대가 가능한 것일까.
시사주간 타임지의 편집국장을 지낸 미국의 대표적 언론인 헨리 그룬왈드도 처음엔 타임지 편집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카피보이였다. 타자기로 기사를 여러 장 복사해 내거나 사내 우편물을 나르던 심부름 소년이 마침내 미국 저널리즘의 최고봉 중에서도 그 얼굴이 된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쳐 미국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의 하야를 불러오게 했던 칼 번스타인 기자 역시 워싱턴 스타지의 카피보이 출신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낙제를 겨우 면한 직후 신문사 사환으로 취직한 그를 사람들은 ‘알팔파’라고 불렀다. 이 소년에게는 자신이 일하던 2층 사무실에서 편집실이 있는 3층으로 기사 카피를 배달하는 순간이 가장 신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자기 나름대로 새로 기사를 써보곤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번스타인과 함께 워터게이트를 파헤친 인물로 미 언론계의 전설로 일컬어지는 밥 우드워드 역시 시작은 지방 주간지에서였다. 번스타인에 비하면 그는 번듯한 대학 간판도 가지고 있었지만 워싱턴포스트지에서 퇴짜를 맞고 난 후 인근 주간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이 후 연일 터져 나오는 주간지의 특종을 보다못한 워싱턴포스트지가 그를 다시 모셔간 것이다. 미국 언론계에는 이런 식으로 출발해 퓰리처상을 받거나 필명을 떨치고 있는 이들이 수 없이 많다. 카피보이나 카피걸들을 수용했던 대표적인 미국 언론들의 융통성은 그들의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미국 직장에서는 공채라는 것이 없고 ‘너는 몇 기’ ‘나는 몇 기’하는 기수꼬리표도 없다. 누가 언제 입사했느냐는 시기에 별다른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그것으로 대접도 받을 수가 없다. 그룬왈드나 우드워드에게 그랬듯이 제대로 된 직장에서는 능력 있는 이들에게 매우 개방적이다. 이런 상시 채용제 아래서는 조직들간의 인적 이동이나 교류가 잦을 수밖에 없고 계속 자기 쇄신을 꾀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언론사는 물론이고 다수 대기업들이 공채를 통해 사람들을 선발하고 있다. 미국의 기준으로 보자면 철저하게 연령과 성차별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나이가 좀 지긋이 들었거나 경험을 가진 이들, 지방무대를 전전해온 다수의 ‘이주일’ 같은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서울 무대’라든가 ‘KBS 공채 몇 기’ 같은 선발된 ‘귀족’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정한 경쟁환경에 길들여진 미국인에게는 우리가 느끼는 ‘이주일 신드롬‘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왜 이리 가슴에 와 닿는지 이해가 힘들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제도가 낳는 소외가 주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뼛속 깊이까지 겪어보질 못한 탓일 것이다.
이주일의 모습은 한편으론 오늘 미국을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언어나 연줄 면에서나 모두 열세일 수밖에 없는 대다수 이민자들에게 그의 죽음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까닭이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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