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민 100주년을 맞아 2003년에 여러가지 기념사업과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동부지역의 경우 뉴욕한인회와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 뉴욕사업회가 ‘대뉴욕 한인100년사’를 편찬하기로 결정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말할수 있다.
1902년 12월22일 102명의 한인노동자들은 일본 여객선 켄카마루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해를 넘긴 후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것을 이민사의 기원이라고 말하면 미주한인 역사의 사실자체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
3년간의 단기 노동계약에 따라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서 눈물과 땀으로 노동하게 된 노동 이민자들의 역사도 매우 귀중한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편이다.
그러나 한인 노동자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이민생활을 개척하기 이전인 1883년 벌써 한인들이 뉴욕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역사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다. 한국인이 미국땅에 제일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1882년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다음해인 1883년으로 당시 조선조의 특명 전권대사로 민영익, 부사 홍영식, 수행원으로 서광범, 현홍택, 유길준, 변 윤, 고영철, 최도민등이 제 1차 친선사절단으로 뉴욕에 도착함으로써 한인의 대륙 개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시기의 미주한인역사는 유학생 시대가 되는 것이다. 유길준은 조선조 말기인 1883년에 한국유학생 제1호로 미국에 남아서 공부했다.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서재필 등 7명은 한말의 개화파로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한후 1885년 5월에 미국에 유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정치외교사의 연구 대상이 되고있는 이승만, 조병옥, 장 면, 장덕수 등 해방 정국에 정치, 경제, 사회, 각분야의 지도자 역할을 한 유학생들은 모두 뉴욕에 와서 콜럼비아대학 혹은 뉴욕대학에서 공부한 유학생 제 1세대들이다. 조선조 말기와 일본 식민지 통치시대에 미국에 건너온 한국유학생은 100명이 넘었다고 한승인은 ‘미국 유학시절 회고’라는 책에 기록하고 있다.
해방 후 1960년대말까지 미국 유학생 수는 3,081명이라고 주미 한국대사관은 집계한 바있다. 유학생중에는 고국에 돌아가서 각 분야에 공헌한 학자와 전문가도 있지만 미국의 대학교수 2,000여명을 포함, 교육기관 및 연구소의 고급인력으로 남아 미국사회에 공헌하고 있는 한인이 5,000~6,000명이 넘는다.
미주한인사의 첫째 시대를 제1차 한미외교사절단 시래라고 한다면 둘째시기는 미국유학생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시기는 미국 여객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13에 하와이에 도착한 노동계약으로 건너온 한인이민이다. 그리고 넷째 시기는 1965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고 한인이민 물결이 파도와 같이 높아진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2002년까지 미국에 이민온 한인이다.
우리가 이민사를 편찬하는것은 이민 선조들이 눈물과 피땀으로 축적해 놓은 역사를 거울 삼아서 우리의 후세들이 뿌리를 찾고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민족은 비참한 역사를 되풀이한다는 말이 있다. 후세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역사를 기록해 놓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라 생각한다.
김일평 코네티컷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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