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텁만은 한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그녀의 일생에 대해 가르친다. 텁만은 1820년 메릴랜드 동부 브로다스 농장에서 흑인 노예인 해리엇 그린과 벤자민 로스의 11명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본명은 해리엇 로스로 후에 텁만이라는 자유인 흑인과 결혼, 이름이 바뀌었다.
10대 소녀 시절 도망쳤다 잡혀온 노예의 손발을 묶으라는 십장의 명령을 거부했다 둔기로 머리를 맞아 몇 달 동안 혼수 상태에 빠졌다 깨어났으나 이로 인해 평생 갑자기 혼절하는 병을 얻게 됐다. 텁만은 친자매가 타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자유롭게 살지 못할 바에야 죽기로” 결심하고 야밤에 숲 속으로 탈출, 자유의 땅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그 후 그녀는 19차례나 남부를 넘나들며 자신의 형제 자매와 부모는 물론 300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를 자유의 땅으로 인도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활약 상이 알려지면서 텁만은 ‘흑인들의 모세’로 추앙 받지만 노예 소유주들로부터는 ‘사회 질서를 해치는 광신적 기독교도’로 매도된다. 그 덕에 남북 전쟁 직전인 1860년에는 그녀 목에 평생 먹고도 남을 돈인 4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그녀는 남북 전쟁 중에는 북군의 정탐 겸 간호사로 활약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1913년 93세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여권 운동에 헌신했다.
텁만은 남북전쟁 전 흑인 노예를 자유의 땅으로 빼돌리는 ‘지하철도망’(Underground Railroad)의 가장 뛰어난 ‘차장’(conductor)의 하나였지만 그녀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헌신했다. 그 결과 1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나 자유의 품에 안겼다.
연방 상원은 9일 탈북자에게 난민의 지위를 부여하는 역사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공화당의 샘 브라운백(텍사스)과 민주당의 테드 케네디(매사추세츠) 연방상원의원이 공동 발의한 이 법안은 하원 승인과 대통령 승인이라는 절차를 남겨두고 있으나 공화 민주 양당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높다.
‘악의 소국’ 북한을 탈출한 후에도 만주에서 굶주림과 북송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탈북자들은 우리 시대의 흑인 노예다. 당시 대다수 미 국민들이 흑인들의 참상에 무심했던 것처럼 지금 한 국민들은 탈북자와 북한 주민의 고통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역사가 기억하는 것은 한 명의 해리엇 텁만이지 무관심했던 다수가 아니다. 이번 법안 통과를 계기로 링컨을 사랑한다는 한국의 정치인과 “대~한민국”을 합창하던 한국민들, 그리고 미주 한인들이 텁만과 탈북자의 의미를 되새겨 봤으면 한다.
<민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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