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불가리아 국민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여러분은 우리 외교관들이 100년 동안 이룬 것보다 더 많은 업적을 단번에 해냈다.” 불가리아 대통령이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회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4강에 진출하자 울먹이며 자국 대표선수들을 이렇게 격려했다. 스포츠 외교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2년 전 베이징에서 미국과 중국의 탁구 단식경기가 있었다. 미국 대표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 중국 대표는 리란칭 부총리였다. 1971년 미국 탁구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해 중국 대표단과 경기를 치렀고, 얼마 후 중국 대표단이 미국에 와 닉슨 대통령과 악수를 했다. 꽁꽁 얼어붙었던 양국관계를 서서히 녹이고, 급기야 미-중 수교의 물꼬를 터뜨린 ‘핑퐁외교’의 30주년을 기념해 ‘키신저-리란칭 한판’을 벌인 것이다.
스포츠는 ‘발 없는 외교관’으로 불린다. 서울 월드컵대회에서 16강 진출 티켓을 확보하기 위한 한국-폴란드 전에는 양국 대통령이 직접 경기장에 나와 응원했다. 두 나라 대통령은 물끄러미 관전만 한 게 아니라 폴란드의 유럽연합 가입과 한반도-유럽 철도연결 사업을 상호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축구가 자연스레 정상외교의 가교가 된 셈이다.
스포츠는 정치 경제뿐 아니라 군사외교에도 한 몫 한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후 여세를 몰아 한국이 개최한 세계 군인태권도선수권대회에는 23개국에서 305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여기에는 중국, 러시아는 물론 한국과 미 수교국인 시리아도 동참했다. 세계 평화와 각국의 군사 우호증진을 목적으로 열린 이 대회는 태권도 종주국의 진가를 발휘하고 한국에 낯선 나라들에게 ‘코리아’를 알린 호기였다.
순수한 민간외교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한 대학 스포츠외교학과 학생들이 중심이 돼 결성된 ‘태권도 평화봉사단’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 이후 황폐해진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태권도 정신에 의거해 현지에서 민간외교를 펼쳤다. 민주주의, 자유 등 화려한 구호는 아니었지만 이들 봉사단은 적지 않은 이라크 주민들의 가슴에 ‘한국인은 친구’란 인식을 심었다.
오렌지카운티 애나하임에서 열릴 ‘2003 세계체조 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 남녀선수 12명이 왔다. 핵 문제를 둘러싸고 긴장이 가시지 않는 미국과 북한 사이지만 정치와 관계없는 운동선수들이 미국에서 좋은 매너와 경기를 보여줌으로써 서로에 대한 마음의 문이 조금이라도 열렸으면 한다. 그리고 지난 71년 ‘핑퐁외교’ 시동 후 8년만에 미-중 수교가 맺어진 것처럼, 앞으로 8년 후 북-미 국교 정상화를 기대하고 싶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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