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러지를 위한 휴가
2주간의 하와이 여행에서 돌아온 아들과 놀아주기 위해 며칠 휴가를 냈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쉬면서 샤핑도 좀 하고 아들 개학준비도 슬슬 도와줄 요량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새벽까지 아빠와 여행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든 아들은 늦게까지 실컷 자고 일어나더니 집이 그리웠는지 엄마를 끌어안고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지난 밤 돌아올 때 멀쩡하던 아이가 아침에 다시 콧물을 족족 흘리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얘가 왜 이러지? 하와이 가기 전에 걸린 코감기가 여지껏 안 나았나? 순간 스치는 생각이 있어 물어보았다.
“너 하와이에서도 콧물 나왔니?” “아니”
“그럼 지금 갑자기 또 나오는거야?” “응”
이게 그럼 앨러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앨러지라면 제일 흔한 원인이 먼지나 꽃가루 같은건데, 캘리포니아 기후 탓인가, 아니면 우리 집이… 순간 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벌써 2년 가까이 우리 아파트 건물 바로 옆에서 대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널찍하고 좋던 테니스 코트를 다 밀어내고 LA에서 가장 호화스런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더니 정말 얼마나 오랫동안 공사를 하는지 지겹기 짝이 없었다.
아침마다 레미콘 트럭이 오며가며 빽빽거리는 소리, 공사장 드릴 돌아가는 소리, 전기못 땅땅 박는 소리... 사정없이 들려오는 소음들에 새벽부터 잠을 설친게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런데 더 괴로운 것은 소리가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날려오는 먼지였다. 근처에 세워둔 자동차들은 세차한지 며칠도 안 돼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쓰는게 일이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먼지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여름인데 창문을 꼭꼭 닫고 살 수도 없고, 뭐 그리 부지런하다고 매일 쓸고 닦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곳만 대강 치우며 살아온게 꽤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지난 몇 년동안 파크 라브레아 부근에서는 초호화 아파트 ‘팔라조’와 건너편에 ‘더 그로브’ 짓느라고 우리 집 주위에서 공사가 끊일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아들이 그날 콧물만 흘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LA의 그 공사판 먼지를 모두 구석마다 켜켜이 재어두고 살았을지 모르겠다.
일단 앨러지인 것 같다는 의심이 들자 우선 먼지부터 없애보자고 결심했다. 그래도 안 되면 병원에 가든지 다른 방도를 내더라도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 할 것 아닌가. 오랜만에 쉬려고 낸 휴가가 아까웠지만 에이, 이왕 아들 위해 낸 휴가, 온가족의 건강을 위해 헌납하는 셈치자 하고 첫날부터 몸 바쳐 청소를 시작했다.
우선 집안에 있는 모든 가구를 물걸레로 훔치고 깨끗이 닦아내었다. 책상, 티테이블, 침대머리, TV, 컴퓨터, 책장, 창문 등등 눈에 보이는 모든 가구와 틈새, 턱이 진 곳을 닦아내었다. 하루 종일 걸레질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을 꺼내고 뒤집어 이불빨래서부터 걸레빨래까지 열판 정도를 하고 나니 이일에만 이틀이 소요되었다.
그 다음날은 남편과 함께 집안 전체를 배큠하고 나서 청소기에 긴 호스를 끼워 먼지 빨아들이기를 시작했다. 창턱, 문턱, 가구들의 뒷부분, 침대밑, 청소기가 못 들어가는 구석, 옷장 속, 그리고 벽과 바닥이 직각으로 닿는 그 모든 부분을 방마다 벽마다 샅샅이 훑어내었다.
고백하건데 혼자 깨끗한 척 하고 다녔던 내가 보아도 창피할 만큼 후미진 곳마다 먼지들이 짙은 회색으로 앉아 있었다. 거미줄처럼 먼지가 늘어진 곳까지 있었는데 매일 먹고 자고만 하는 동안 하나도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나는 투베드룸 아파트 집안에 구석이 그렇게 많고, 벽을 따라 이어지는 동선이 그렇게 긴 줄 처음 알았다. 아울러 청소기 안에서 나온 먼지 덩어리를 보는 순간, 마치 내가 ‘대장청소‘라도 한 것처럼 시원해졌다.
그러니까 우리 식구는 그동안 먼지 구덩이에서 살았던거다. 청소를 시작한 그날 오후부터 아들은 콧물을 흘리지 않고 있다. 정말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동안 얼마나 더럽게 살았으면 아이에게 앨러지가 생겼을까 싶으니,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하여 얼굴을 들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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