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역사다. 중세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고, 20세기에는 나치 점령과 공산 정권을 겪으며 유럽의 상처를 고스란히 껴안아야 했다. 역사 속에 반복된 폭력과 침묵, 그리고 사라진 이름들은 아직 이 도시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고요해 보이지만, 프라하는 오래도록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도시다.
얼마 전 어떤 분의 소개로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거대한 여인이 등장한다. 키가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구의 몸을 이끌고 천천히 프라하 거리를 다닌다.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없다. 그저 울고 있을 뿐이다. 눈물로만 존재를 증명하는 이 여인은, 도시 전체의 기억을 몸으로 짊어진 상징적 존재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울음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 울음은 단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 도시가 역사 속에서 감추고, 억누르고, 끝내 발설하지 못한 고통의 파편들이다. 말은 해석을 전제하지만, 울음은 해석 이전의 언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독자가 문장을 읽는 행위를 넘어, 울음을 듣고 체험하는 과정이 된다.
실비 제르맹이 이 소설을 쓴 이유는 분명하다. 그녀는 프라하에 기록되지 않은 고통의 흔적을 문학의 언어로 다시 불러내고자 했다. 냉전 체제 아래 침묵을 강요받았던 시민들, 종교와 민족, 이념에 따라 강제로 사라지고 기억되지 못한 존재들의 음성을 듣기 위해, 제르맹은 이 환상적인 여인을 창조했다. 말보다 더 깊은 언어, 울음으로 존재하는 이 여인을 통해, 그녀는 묻힌 기억과 비가시적 상흔을 시적으로 형상화했다. 이 소설은 이야기라기보다, 하나의 기억을 의식화하는 작업이 되었다.
도시의 비극을 한 여성의 형상으로 육화하여 기억의 제의를 올리는 이러한 방식은 우리 문학이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다루는 태도와도 깊은 공명을 이룬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속 소년은 광주라는 도시의 고통 속에 영혼처럼 떠돌며 울음을 남긴다. 김숨의 『한 명』에 등장하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는 말을 잃은 몸으로, 잊힌 역사 전체를 걸어 다닌다. 이들은 이름보다 앞선 고통의 실체이며, 말보다 먼저 존재한 증언의 육체다. 제르맹의 여인처럼, 한국 문학 속 침묵의 여성들 또한 도시와 역사, 몸과 기억을 동시에 짊어진다. 이들은 말하지 않지만, 도시에 가장 오래 남는 언어로 우리를 부른다.
울고 있는 여인은 프라하에만 있지 않고 제주 4·3의 불탄 마을에도 있었고, 서대문 형무소의 음습한 복도에도 있었으며, 골령골의 붉은 흙 아래에도 있었다. 한국의 역사 속에도 얼굴 없는 여인이 있었다. 전쟁과 억압, 이념의 이름으로 지워진 이름들, 침묵 속에서 사라진 존재들. 문학은 이처럼 잊힌 존재에게 음성과 형체를 돌려주는 작업이다. 말보다 깊은 울음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자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문학의 몫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방식이다.
우리 이민자의 삶 속에도 차마 내뱉지 못한 울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단지 슬픈 소설이 아니다. 어쩌면 그 울음은 도시가 우리에게 전하는 마지막 언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울음이 끝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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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서북미문인협회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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