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꽃 하면 역시 교향곡이 아닌가 한다. 오페라의 경우는 무대의 극적인 호화찬란함에도 불구하고 교향곡이 안기는 순수한 향기에는 감히 접근할 수 없다. 그러기에 교향곡 작곡가들은 교향곡만 쓰고, 오페라 작곡가들은 주로 오페라만 써왔던 경향을 보여왔다. 역사상 모차르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교향곡과 오페라 양 부분에서 모두 성공한 예는 드물다. 베토벤은 경우는 오페라 ‘피델리오’가 실패하자 더 이상 오페라에는 손대지 아니했고, 차이코프스키의 경우도 ‘유진 오네긴’등 몇 몇의 소품 오페라들을 남겼으나 거의 공연되는 예가 드물다시피하고 있다.
교향곡은 베토벤의 ‘운명’을 정점으로 새로운 교향곡 시대가 태동했다. 물론 요즘에야 브르크너, 말러등의 뛰어난 교향곡 작품들이 교향곡계를 장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베토벤의 ‘운명’이 빠진 교향곡의 세계는 김빠진 맥주나 다름없다. 베토벤의 ‘운명’이 미친 영향력은 그 번호 ‘5번’이 미친 영향력하나만으로도 그 진가를 실감하고 남는다. 이름 있는 교향곡 작곡가 치고 5번 교향곡을 소홀히 하고 있는 작곡가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드보르작의 교향곡 5번(신세계)이 나중에 9번으로 둔갑한 것을 제외하고는 쇼스타코비치를 비롯 차이코프스키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5번을 통해서 ‘운명’에 도전하는 예술가로서의 웅지를 표현했다.
이중 쇼스타코비치의 ‘5번’은 베토벤의 ‘5번’에 버금가는 작곡가 최고의 교향곡으로 손꼽히고 있고, 시벨리우스, 말러, 브르크너등도 5번 교향곡에서 뛰어난 수작을 남기고 있다.
교향곡 작곡가들이 베토벤을 염두에 둔 흔적은 여러부분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특히 교향곡 9번을 그들의 마지막 교향곡으로 삼고 있다는 것, 그리고 ‘5번’에서 역작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수준을 살펴보면, 최고의 교향곡은 브루크너(墺, 1825-1899)의 것을 꼽고 있다. 브르크너는 평생 교향곡 외에는 몇몇 종교곡을 제외하고는 일체 손대지 않은 작곡가로서 20세기들어 가장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로 칭송 받고 있다. 말러의 교향곡들은 요란벅적… 오페라(극음악)에 가깝고, 쇼스타코비치의 힘찬 선율은 20세기의 새로운 기법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기계적이고 차가운 맛이 느껴지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눈부신 선율에 도취돼 있고, 시벨리우스의 경우는 오케스트레이션이 비교적 호평을 받고있다.
그럼에도 통일된 것은 이들 교향곡 작곡가들이 노래하고 있는 것이 한결같이 희망이라는 점이다. 일종의 낭만주의의 연장이라고할까, 특히 5번에서는 절망조차도 사랑하고 긍정하고 있다는, 강한 삶의 의욕이 역동치고 있다는 점이 5번의 공통점이다. 20세기의 문학등이 나태한 감상으로 허무주의를 노래하고 있는데 반해, 음악은 나름대로 삶의 구멍난 자리를 메꾸어 보려는 장렬한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얼마 전에 상영됐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독일군 장교가 피아노곡으로 인해 주인공을 살려주는 장면은, 음악이 얼마나 인간을 본성으로 돌아가게 하는 가를 리얼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장면이다. 사람은 그 음악의 힘 때문에 음악을 동경하고, 그 향연에 참여하기를 소망한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듣고 있으면 그 암울하던 시대에, 그 공산 철의 장막 속에서 어떻게 그런 힘차고 긍정적인 노래가 흘러 나올 수 있었는지… 역경 속에서 울리는 힘찬 화음이기에 더욱 감동의 떨림으로 전율하곤 한다.
부르크너의 5번 교향곡도 언젠가 데이비스(심포니홀)에서 감동의 세례를 받던 곡이다. 性의 향연, 成功의 도취로만 가득한 세계에서 어떻게 하나의 객관적인 예술이 그처럼 순수한 희열로 삶을 열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 과연 음악만이 안길 수 있는 축복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5번 교향곡은 청소년시기에 가장 좋아하던 곡으로 얼마 전 로스트로비치의 지휘로 다시 들으면서 감동을 회상했던 곡이었다. 로망롤랑은 베토벤의 5번(운명)이 없는 세계가 무지개 없는 세계라 했지만 차이코프스키의 5번 만큼 또한 청춘을 무지개로 들뜨게 하는 작품도 드물다.
말러의 ‘5번’의 경우는 아다지오가 유명하다. 가장 처절한 절망도 더 이상 절망이 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노래하고 있는데, 말러 만큼 베토벤을 닮은 수많은 수작을 남긴 작곡가도 드물다. 특히 ‘부활’등을 노래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불행도 감히 소멸할 수 없는 음악에 대한 불멸의 열정이 토로되고 있다.
시벨리우스의 5번은 가장 독특하다. 신비에 대한 끝없는 탐닉인데 하나의 교향곡이 이처럼 깊은 자아침잠, 내면의 깊숙한 피안의 세계로 이끌려 가는 것도, 시벨리우스의 작품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다.
아무튼 5번 교향곡들은 모두 긍정의 희열로 넘쳐 난다. 마치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서의 유태인이 켜는 바이올린처럼, 인생은 고달픈 ‘0(제로)’이기에는 음악은 너무도 아름답다. 지금 5번 교향곡을 선택해 듣는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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