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들은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의 하나인 ‘리어왕’(King Lear)의 주인공을 자식 때문에 치매환자가 되는 전형적인 예로 보고 있다. 80세에 이르러 리어왕은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딸로서의 당연한 의무를 다하겠다’는 막내딸 코데리어를 쫓아내고 오로지 아첨만 일삼는 맏딸과 둘째딸에게 왕국을 둘로 나누어 물려준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리어왕은 이때 이미 판단력이 흐려지는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것을 물려준 뒤 약속대로 두딸네 집을 번갈아 오가며 살던 리어왕이 냉대를 받다가 문전 박대까지 당하자 마침내 광인(狂人)이 되어 광야를 헤맨다. 이 사태를 안 코데리어는 남편인 프랑스왕과 함께 리어왕 구출에 나섰지만 코데리어는 아버지와 함께 영국군의 포로가 된다.

막내딸과 철창 사이로 말동무가 되어 지내는 감옥생활은 오히려 천국인양 즐거웠고 증세도 몰라보게 호전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옥중에서 딸이 교살된 시신을 보자 그는 충격 끝에 죽는다. 이 과정은 치매증세의 발전과정 그대로일뿐더러 치매에 대한 여러 가지 교시를 함축하고 있다.

치매의 첫 신호는 체중감소로부터 시작된다. 후각기능의 상실로 식욕이 감퇴될 수도 있지만 이런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곧 가족 사이에 노인이 느끼는 소외감(疎外感)이다. 가족들이 리어왕의 두딸 처럼 겉으로는 신경을 쓰는 체 하면서 속으로 ‘귀찮은 존재’로 치부한다면 노인이 과연 정상적인 식욕을 가질 수 있을까.

초기에는 식욕감퇴와 함께 기억력(이름, 대화, 약속 등) 상실, 병이 진행되면 의심증이 생기고 행동 태도의 변화가 생긴다. 말기 증세로는 판단력의 완전 상실, 무감정, 대소변 실금 등으로 악화되면서 사랑하는 아내 등 가족들도 기억을 못하게 된다. 이 병은 뇌신경 섬유가 엉키면서 건강한 뇌세포들이 서서히 죽어 가는 병이다.

흔히 노망(老妄)이니 실성(失性)이니 하는 치매(癡　)는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녀는 물론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그 자녀 자신도 유전이 안될까 은근히 걱정이 되는 슬픈 병이다.

전 미국대통령 레이건이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다고 발표한 후 아직도 이렇다할 의료진의 개가 없이 간병에 시달린 낸시 레이건은 ‘우리는 많은 세월을 이미 잃었다’(We’ve lost so much time already.)고 비통했다.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하나 꼴 이상으로 점점 늘고 있는 치매 환자 대다수는 이렇다할 대처

방법 없이 환자를 방안에 감금하거나 묶어두고 심하면 수면제 등을 먹여 잠재우기까지 하는 실정이다. 그러다가 이 노인들은 어둡고 습한 그늘에서 생을 거둔다.

『여기 계신 할머니들은 미치지 않았어요. 애들처럼 순수할 뿐이에요. 가끔 정신이 돌아 온 노인이 “어디 가지마 이렇게 손을 붙잡고 애원할 때면 가슴이 뭉클합니다』이 말은 본국의 샘터마을에서 치매노인들을 돌보고 있는 한 자원봉사대원의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걸 보면 치매는 외로움과 무관심에서 생기는 “고독의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9월 21일은 세계보건기구(WHO)가 94년에 제정한 ‘세계치매의 날’이다. 환경심리학회등의 연구에 따르면 치매환자도 환경을 깨끗이 해주고 온화하게 대해주면 무표정했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온다고 했다.

‘세계 치매의 날’을 맞아 열린 ‘성공적인 간호사례 세미나’에서도 특효약은 ‘가족의 사랑’일 뿐이고 나이가 들수록 수족을 움직여 뇌신경세포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고 덧 붙였다.

「손은 밖으로 나온 뇌」란 말은 손 특히 손가락 끝의 경략(經略)을 자극하면 뇌기능이 활성화된다는 동양의학의 한 비유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사람은 2백여년 전의 독일의 철학자 칸트였다. 과연 그가 ‘손이 쉬면 뇌가 녹슨다’는 뜻으로 얘기한 것인지 하나의 궁금거리다.
위에서 리어왕은 비록 감옥생활이지만 막내딸과 철창 사이로 말동무가 되어 지내는 사이에 그곳이 천국 같이 느꼈고 증세도 호전되었다고 했다. 가족으로부터의 소외감이 그의 병세를 부추기고 따듯한 포옹이 그의 증세를 호전시킨 것이다.

소외 중에서도 견디기 어려운 소외는 사회 또는 자식으로부터 받는 소외보다 부부간의 소외라고 한다. 그래서 서로 같이 사는 동안만이라도 개구리가 한데 몰려 볼을 맞대고 동면(冬眠)하는 “프로깅 상태 (Frogging State)와 같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길 들여진 상대를 서로 이해하고 동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일흔 살 줄은 등 긁어줄 아내가 있어 산다’는 일흔 살이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것은 “서로 의지한다는 이 의지의 대상은 꼭 사람만이 아니고 어떤 절대자일 수도 있고, 길 들여진 내가 아닌 나일 수도 있고, 명상, 독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 뭘 그렇게 자식들에게 기대하는 게 많으세요. 연세가 들면 가족들이나 사회로부터 세대 차이를 느끼고 소외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젊은 저도 회사에서 후배들에게 밀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무조건 대접받기 원하고 서운해하시기 보다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되살려 이 사회에 기여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대접받기 위해 자식 키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이 말은 노인 프로그램만 16년간 담당한 한 KBS 프로듀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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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