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제법이 필요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 말은 국제 정치사에 한 획을 긋는 발언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초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의 도덕성과 나의 생각뿐”이라며 자신의 뜻이 국제 규범보다 우선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했다. 전 세계가 어렴풋이 느껴온 ‘규칙 기반 질서’의 붕괴가 명확해진 순간이다.
돌이켜보니 이 말은 직전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사후 설명인 동시에 다가올 더 큰 재앙에 대한 사전 예고나 다름없었다. 인터뷰가 공개되기 나흘 전 미군은 베네수엘라에 침투해 현직 대통령이던 니콜라스 마두로를 전격 생포했다.
그리고 약 2개월 뒤 미군과 이스라엘군이 함께 이란을 공습해 중동에 화염을 일으켰다. 국제법은 있으나 마나 한 상태가 됐다. 유엔헌장의 무력 사용 금지 조항을 위반한 전쟁에서 포탄은 민간ㆍ의료시설 위로 떨어졌다. 이란을 겨냥해 “한 문명 전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위협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전쟁범죄 논란에 휩싸였다.
불과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일들이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강제 병합할 야욕을 내비치고 유럽 내 주둔 미군 재배치를 거론하면서 약 80년간 유지돼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붕괴 일보 직전이다.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참혹한 전쟁이 5년째 계속되고 있다.
호르무즈해협 봉쇄는 과거의 숱한 중동 분쟁 와중에도 가능성이 희박한 ‘블랙 스완(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일단 발생하면 큰 충격을 주는 사건)’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국의 공습으로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사살되자 검은 백조가 날아올랐다.
1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했던가. 이란 종전 협상 결과가 어찌 되든 중동 질서가 전쟁 전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뒤엎는 강대국이 일방주의의 수위를 높이면서 어느덧 전쟁은 ‘뉴 노멀’이 됐다. 국제 규범이 약해진 틈을 타 국경을 넓히고 힘을 과시하려는 국가들이 또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일지 예측하기 어렵다. 뒤얽힌 국제 관계에서 분쟁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도 알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다음 차례는 쿠바”라고 예고했다. 중국의 대만 무력 침공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설마’로 치부할 수만은 없게 됐다.
세계적 투자자 레이 달리오는 이란 전쟁이 “중국ㆍ러시아ㆍ이란 등이 한쪽 편에, 미국과 미군 기지를 둔 국가들이 다른 한편에 선 잠재적 세계대전의 일부”라며 “우리는 이미 3차 세계대전의 초기 단계에 있다”고 진단했다. 예일대 역사학과의 오드 아르네 베스타 교수는 오늘날 세계가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전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과격한 비관론을 조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경고와 우려가 현실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까다롭고 복잡한 외교 해법보다는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무력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국가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평화를 장담할 근거가 약해진 것도 사실이다.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분쟁의 시대’에 한정된 외교·안보 자원으로 살아남으려면 리스크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 대미 소통을 강화해 트럼프발(發) ‘동맹 리스크’를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다.
행여 주한미군 재배치 등 안보 변수가 불거지지 않도록 선제적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협상력을 키우고 국제 공조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전방위로 외교를 다변화하는 것은 필수다. 동맹이나 우방과의 관계 강화 못지않게 적을 만들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불필요한 외교 갈등이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X(옛 트위터)를 통해 과거 이스라엘방위군(IDF)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살해 행위를 ‘유대인 학살’에 빗대면서 논란이 커졌다. 하필 홀로코스트 추모일 전야에 나온 이 발언에 이스라엘은 강력한 규탄의 뜻을 밝혔다.
‘보편적 인권’ 중시라는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규칙과 관례, 관용과 인내가 사라진 국제 환경에서 국가 지도자의 정제되지 않은 외교 발언은 오해와 갈등을 초래하며 예상 밖의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전 세계가 살얼음판이다. 어느 때보다도 외교적 신중함이 요구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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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립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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