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왕녀 이해경 옹주 워싱턴 강연회
▶ 미국생활 50년... 영욕의 근현대사 전해
아버지는 왕이었다. 옥좌에 오르지 못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족. 고종의 셋째아들인 의친왕이었다.
신식여성인 어머니는 왕실의 보모였다. 그러다 의친왕의 눈에 띄어 시쳇말로 후처가 되고…. 1930년 그는 13남 9녀중 다섯째로 옹주란 이름을 얻는다.
지금은 일흔 셋의 노파가 된 이해경(사진) 여사. 세살 때부터 그는 생모의 품에서 떨어져 의친왕이 있던 사동궁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의 양육은 정비인 연안 김씨의 몫이었다.
제국의 신민(臣民)이 된 나라에서 그녀는 검소하고 엄격했다. 초등학생인 옹주의 교복이 헤어져도 수선시켜 입게 했다.
“난 뭐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궁안의 소녀는 낡은 교복이 친구들에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왕녀란 신분은 지엄한 것이었다.
자동차로 등교하고 궁에서 지어온 김나는 점심을 먹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혼자서 목욕을 해본 일이 없었다.
46년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광복과 전쟁은 그의 삶을 평민으로 격하시키며 뒤흔들어놓았다. 이왕직(李王職)의 재산은 국고로 몰수됐다. 안국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던 이화여대까지 걸어서 통학하고 쌀이 떨어지자 혼수를 팔아 연명했다.
풍문여고 음악교사로 재직하다 전쟁을 만났고 도망치지 못한 죄는 부역혐의로 다가오기도 했다.
잊고싶은 조국이었고 왕족이란 고귀한 신분은 버리고싶은 굴레였다. 아버지인 의친왕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56년 홀홀단신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텍사스에서 성악을 공부하며 생활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식당 종업원, 일본인 백화점의 비서등 온갖 험한 일을 다 겪었어요.
졸업 후, 뉴욕으로 옮겨갔지만 불법 체류자 신분 때문에 유아원 보모로 일하며 숨어 지내기도 했다.
1969년 그는 콜럼비아대의 동양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들어갔다.
성악가의 꿈은 접었지만 사서로서의 세월은 자신과 아버지,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시간이었다. 술과 여자만 탐한 왕자로 알려진 의친왕의 독립운동 기록을 발견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혐오를 버렸다.
1996년 한국학과장으로 은퇴한 이듬해에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잃어버린 한국 역사를 만나고, 아버지를 정당히 복원시키고 자신의 본성을 되찾은 기이한 숙명의 마지막 왕녀는 지난 12-13일 이틀에 걸쳐 기구한 개인사에 깃든 영욕과 근현대사의 치욕을 워싱턴 한인들에 증언했다.
건스턴 코이노니아센터(대표 이정우)와 북버지니아한인회(회장 강남중)가 공동으로 마련한 강연회에서 이해경 여사는 아득한 저 먼 과거를 현실로 불러내며 오늘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인생이란 게 별 어려움이 다 있어서 지금 당장 죽고싶지만 그걸 이겨내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이 세상에 정말 중요한 건 없습니다. 낙관이야말로 참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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