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한 지난 12일 저녁, 노무현대통령이 아들 및 측근들과 부부동반으로 삼청각에서 뮤지컬 ‘인당수 사랑가’를 관람했다는 소식은 본국은 물론 미주 한인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이다.
한 독자는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억장이 무너진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대통령 맞아요? 국민들은 태풍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대통령은 태연히 뮤지컬을 관람해요? 아무리 막가는 대통령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요?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이 어찌 그 분 뿐이겠는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 같은 심정일 것이다.
대통령이 공연장에 앉아 즐기고 있을 때 태풍은 제주도를 강타하고 시속 60㎞의 속도로 맹렬하게 북상 중이었다. 영호남 일대에 태풍경보가 내려져 있었고, 전 공무원이 비상근무 중이었다.
억수 같은 장대비와 사람도 날려버리는 태풍으로 집과 도로가 유실되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농민들은 한 톨의 곡식이라도 건지기 위해 어둠 속에서 밤새 폭풍우 속을 헤집고 다녔다.
이 날 밤 태풍으로 전국에서는 13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돼고 재산피해는 4조7,810억원에 달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대통령이 뮤지컬이나 감상하고 있을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정상적이라면 재해대책본부 상황실에 앉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태풍의 진로와 피해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그건 진보도 개혁도 아니다.대통령의 기본 자세일 뿐이다.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라면 아무리 부속실에서 추석연휴 일정으로 준비한 것이라고 해도 스스로 관람을 취소했어야 했다.
대통령이 보자고 해도 참모들이라도 관람 취소를 건의했어야 했다. 동행한 비서관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 많은 부속실 관계자들은 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디 그들뿐인가. 재경부총리는 그 날 태풍 경보 속에서도 제주도에서 친구들과 골프를 치다 발이 묶여 귀경도 못했다. 태풍의 주무책임자인 행자부장관은 공무원들을 비상대기 시켜놓고 자신은 추석을 쇠러 고향에 내려갔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니 누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태풍 속에서 골프연휴를 보낸 경제부총리를 대통령이 어찌 질책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골프 건 때문에 난감해진 부총리와 격려성(?) 독대까지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국민 앞에 사과의 말 한마디는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이번에는 아무 말이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잘도 하던 대통령이 묵묵무답이다.
마치 태풍 대비야 관계 공무원들이 하면 되고, 대통령이 뮤지컬 좀 본 걸 가지고 뭐 그리 난리냐는 항의성 침묵 같다. 아니면 보수언론이 대통령을 음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진다는 오기성 묵언인가.
대통령의 심중은 여론이 매우 악화된 며칠 후에야 청와대 소식지인 ‘청와대 브리핑’에 간략하게 언급됐다. 부산·경남·울산지역 언론인들과의 합동 인터뷰를 준비하는 자리에서 국민들께 송구스럽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마음이라면 그 말 한마디면 족하다. 겨우 청와대 소식지에, 그것도 인터뷰 준비과정에서 짧게 언급한 것이야 더한 일도 많았는데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내심 별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청와대 브리핑’은 대통령의 그런 심중을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대통령이 저녁시간에 관저에 대기하면서 TV를 보는 것이나, 청와대 지근거리 행사장에서 이미 예정됐던 일정을 진행하는 것이나 실제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날 경호상 필요 등으로 청와대에서 예약한 좌석은 수십여석이었고 당시 낮은 예매율 등을 고려했을 때 공연을 2~3시간 앞두고 취소하면 100여석에 불과한 공연장이 썰렁해져 행사주최측서 느낄 실망감도 부담이 됐다’
또 있다. ‘부시 미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 와중에 텍사스 목장에서 휴가를 보낸 것이나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처럼 폭염 피해 중에도 바캉스를 즐긴 것도 현지에서는 생산적인 국정운영이라는 차원에서 찬반 여론이 다 있다’
그래,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은 태풍으로 민생이 유린되고 있는데 태연히 뮤지컬이나 보고 있어야 하는가.
공연 주최측인 서울시의 실망감에 대한 배려는 참으로 눈물겹다. 그러나 태풍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수재민들의 절망감은 그 보다 못하단 말인가.
부시나 시라크의 휴가는 상황이 다르다. 태풍 ‘매미’보다 더 강력한 허리케인 ‘이사벨’이 미 동부를 강타했을 때 부시는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다. 그 때 부시대통령과 백악관은 허리케인이 오는 날 요르단 국왕과의 일정까지 조정하며 국민과 함께 대피훈련을 했다. 외빈과의 약속이라 어쩔 수 없이 캠프 데이비드 산장으로 떠나면서도 대신 체니 부통령을 워싱턴에 체류시켜 사태에 대비토록 했다.
보통 사람들도 나라에 큰 재난이 생기면 행동을 자제한다. 하물며 대통령이야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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