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서 가까이서]
▶ 정태수 <편집 부국장>
아니나 다를까 한국 축구계가 온통 난리법석이다. 월드컵 4강에 빛나는 한국이 아시안컵에서, 그나마 본선도 아닌 예선에서 약체 베트남(0대1)과 오만(1대3)에 연패를 당했으니 조용히 넘어간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늘 그렇듯 비난의 화살은 포르투갈 출신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에게 쏟아지고 있다. 대한축구협회나 프로연맹·각종 축구동호회 사이트에는 육두문자를 동원해 코엘류를 단죄하라는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국가대표팀이 귀국하는 날 일제히 인천공항에 나가 계란세례를 퍼붓자고 선동하는 이들도 있다. 개중 좀더 지켜보자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오른 비난에 파묻히고 있다.
그러나 축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한국인들에게, 더욱이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 지중해 3강을 연파하고 4강 돌풍을 일으키면서 눈높이가 한껏 높아진 코리안 축구팬들에게, 이번 소동은 어쩌면 당연하다.
정작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한 거스 히딩크 전 감독 또한 코엘류 못지 않은 고초를 겪었다. 지난해 1월 중순부터 2월초까지, 그러니까 월드컵을 불과 몇달 앞둔 골드컵 대회때 벌어진 일이다. 한국이 쿠바에 비기고 멕시코 2진에 승부차기까지 가고 결국 캐나다에 1대2로 패하자 물러나라는 성화에 시달렸다. 선수들 컨디션의 피크타임을 월드컵에 맞추고 있다며 그때 가서 뭔가 보여줄 것이라는 그의 항변은 쇠귀에 경읽기였다.
결과적으로 히딩크의 장담은 몇곱절 기막히게 들어맞았다. 그렇다고 그날그날 승패에 울고 웃는 장삼이사 축구팬들에게 ‘몇달 앞도 내다보지 못한 죄’를 따져물을 건 없다. 문제는 자칭타칭 축구전문가들이다. 전문가답게 냉정한 대안을 제시해야 할 그들이 일반인들의 불붙은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행위를 일삼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난해 골드컵 때 히딩크 때리기에 앞장섰다가 월드컵 때 머쓱해진 그 얼굴들이 또 나서서 코엘류 타작에 앞장서고 있는 것을 보면 염치가 없는 것인지 기억력이 나쁜 것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다. 공격 메뉴나 기법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선수단 숙소(호텔)에 애인을 불러들였다는 등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이유를 내세워 히딩크를 공박했듯이 이번에도 축구와 관계없는 사생활까지 들춰가며 코엘류를 닦아세우고 있다.
전문가란 사람들이 팬들의 불끈 정서에 영합해 감독을 무자비하게 족친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지난 10년동안만 되돌아보자.
94년 미국월드컵팀을 이끈 김호 감독은 우승후보 스페인에 2대2 무승부를 거두고 디펜딩 챔피언 독일에 2대3으로 분패하는 등 상대국 언론조차 격찬할 정도로 선전을 거듭했지만 1승 제물로 삼았던 볼리비아전을 1대1 무승부로 끝낸 탓에 귀국 비행기에 오르기도 전에 후임 감독 임명 소식을 들어야 했다. 뒤를 이은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의 운명도 나아진 게 없었다. 숙적 일본을 격파하고 96년 애틀랜타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전을 1위로 통과하자 배추(그의 애칭)를 귀화시키라는 등 온갖 찬사가 쏟아졌으나 본선 8강 진입에 실패한 뒤 애틀랜타에서 러시아로 곧장 귀국해야 할 정도로 험악한 여론뭇매를 맞아야 했다.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 4강신화의 선봉장 박종환 감독은 그해 12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이란에 2대6으로 패하는 등 부진 때문에 추운 겨울에 새벽 비행기로 귀국한 뒤 곧바로 지휘봉을 내놓아야 했다. 박종환 감독의 후임자는 한국 축구 100년사의 최고스타 차범근. 그러나 천하의 차범근 감독도 비운을 비껴가지 못했다. 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연승행진을 거듭하며 본선티켓을 따내자 차 감독은 한창 무르익은 당시 대선분위기와 맞물려 차범근을 대통령으로!라는 구호에 휩싸였으나 본선부진으로 대회도중 퇴진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부 전문가들은 이때다 싶은 듯 부인이 감독처럼 설쳐댄다는 등 소문을 퍼뜨려 가뜩이나 쓰라린 차 감독 가슴에 소금을 뿌리기도 했다. 허정무 감독은 또 어땠는가.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1대0 승리를 거두면서 하늘끝까지 치솟았던 ‘진돗개(허 감독의 애칭) 예찬론’은 2000년 12월 아시안컵 부진과 함께 온갖 비난속에 과거형이 돼버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감독만 희생양으로 삼을 것인가. 그것이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얼마나 순기능을 할 것인가. 94년 월드컵 때 디펜딩 챔피언이자 사상최초의 통일독일팀을 이끌고도 8강 탈락의 쓴잔을 들었던 베르티 포그츠 감독이 4년 뒤 프랑스월드컵에서도 지휘봉을 잡았다든지, 지난해 월드컵에서 우승후보 0순위로 꼽혔다가 예선탈락의 망신을 당한 아르헨티나의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이 여전히 직책을 보전하고 있음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다름아닌 한국팀 히딩크 감독의 경우에서 아무런 교훈을 찾지 못한다면 한국 축구의 미래는 암담하다. 월드컵 4강 신화 역시 빛나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후임 감독들의 목을 조르는 족쇄로 전락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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