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죽으면 죽었지 은희는 절대 포기 못한다고? 포기라는 말은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했다. 이날 이때까지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민 와 십 수년간 제 놈을 위해 내가 안 해본 일이 있는가 말이다. 야문 손끝을 밑천 삼아 옷 수선, 케이터링, 행사용 꽃꽂이까지... 막말로 김치를 담아 파느라 지금까지 내가 절인 배추만 해도 제 녀석 평생을 산 날보다 많을 터였다.
모자가 벌써 두어 달째 팽팽하게 맞서오기는 했어도 꿈에라도 가출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아들의 입에서 그런 모진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왜 하필 은희냐구, 글쎄. 정순을 보자마자 쏟아진 눈물은 손수건 한 장을 거의 다 적신 후에야 잦아들었다. 정순은 근래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남편을 잃고는 부쩍 마음을 기대온 옛친구다. 하지만 LA와 산호세에 떨어져 살다보니 잘해야 일 년에 한두 차례나 만났을까. 그나마도 먼길 찾아오는 쪽은 언제나 시간여유가 있는 정순이 쪽이었다.
제가 감히 우리집안을 다시 기웃거려? 고무신 바꿔 신을 때는 언제고. 부자 신랑 만나 천년만년 잘살 것 같더니만 겨우 일 년만에 갈라서더라고. 그래놓고는 새삼 총각인 우리아들과 재혼을 하겠다고? 그쯤에서 나는 정순에게 냉수 한 컵을 청해 벌컥벌컥 들이켰다.
애구, 천하에 못난 놈! 어디 여자가 없어서... 저는 벌써 다 용서했는지 몰라도 나는 절대로 못해. 은희 결혼식날 제 놈이 못 먹는 술까지 퍼마시고 짐승처럼 울부짖던 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구. 그 순간 정말로 아들의 울음소리가 끄억끄억 귓전에 울리는 듯 했다.
이참에 먼저 간 영호아빠 생각이 많이 나겠구먼. 조용히 듣기만 하던 정순이 불쑥 죽은 남편 얘기를 꺼냈다.
아닌게 아니라 남편생각이 간절했다. 비록 남들처럼 호강은 못 시켜줬어도 남편은 평생 아내에게 하대를 해본 적이 없는 다감한 사람이었다. ‘과연 남편이 살아있어도 녀석이 이렇게 고집을 피울 수 있었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새삼 남편의 든든한 울타리가 절절하게 그리웠다.
아들은 내가 떠나온 사흘 동안 정순의 집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왔다. 번번이 전화를 피하는 나도 고역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어설프게 끼어 든 정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별 말은 안 했지만 사실 정순은 영호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 애도 영 안됐다며 낮은 한숨을 쉬곤 했다.
그녀가 볼일이 있다며 외출한 오후, 혼자 남겨진 그의 저택은 유난히 덩그랬다. 대리석 바닥과 고급 샹들리에, 매끈한 가죽소파는 되레 썰렁한 느낌만 부추겼다. 방마다 문을 열어보아도 자식들이 떠나버린 빈방에선 한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있어보니 집이 너무 크더라. 사람을 채우던지, 아니면 집을 옮기던지 해야지 어디 적막해 견디겠니? 석양녘의 베란다는 이런 류의 얘기를 꺼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한꺼번에 그 둘 다를 하면 어떨까? 살포시 웃는 그녀의 모습이 단순히 농담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쯤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던 정순의 고백이 언뜻 떠올랐다. 그녀가 지나가는 투로 가볍게 말한 탓도 있지만 곧이어 영호 결혼문제가 불거져서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지내온 게 사실이다.
도무지 믿어지질 않아. 지금 나이에 이런 사랑이 찾아왔다는 게 말이야. 마치 밤하늘 큰 별 하나가 가슴에 뚝 떨어진 느낌이야. 그녀의 두 뺨이 금새 노을 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평소 정순은 자신을 곧잘 밀랍인형에 비유하곤 했다. 사실 그녀는 남편의 당당한 지위와 재산 때문에 지금껏 말 그대로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귀하신 사모님이 줄곧 부러워했던 건 우습게도 고달픈 내 삶이었다.
너는 늘 네 몫의 역할이 있었잖아. 아내와 엄마로서 말이야. 나는 너무 잘나서 아내 따위는 도무지 필요 없는 남편 곁에서 그냥 초상화 모델처럼 서있었던 거야. 아이들 셋도 필요한 건 모두 제 아버지를 찾았지. 난 사실 아이들이 언제 등록금을 내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어.
아무튼지 축하한다. 그런데 너를 이렇게 들뜨게 만든 남자가 누군지 너무 궁금한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 나, 임정순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여차하면 아주 여기 눌러 살까 했더니 이제 그나마도 안되겠네. 그나저나 국수는 언제쯤 먹여줄래? 국수라는 말에 정순의 얼굴빛이 짐짓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자식들의 반대가 심해 당장은 곤란하다며 말끝을 흐렸다.
내가 오늘 어딜 다녀왔는지 알아? 사실은 나 변호사 만나고 오는 길이야. 의아해하는 내 눈길을 피해 그녀는 이제 반쪽밖에 남지 않은 해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단순히 제 아버지에 훨씬 못 미치는 그 사람의 배경이 문제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부끄러운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가만 보니 그것만도 아닌 것 같더라고. 이참에 아예 저희들 불안하지 않도록 재산을 깨끗이 정리해줄 생각이야.
두 사람이 침묵하는 사이 해는 마침내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물러갔다. 어슴푸레 날이 저문 탓일까. 평소 아담한 정순의 실루엣이 오늘따라 유난히 왜소해 보였다. 나는 슬며시 다가가 소녀처럼 작고 보드라운 정순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그 가는 떨림의 파장이 증폭되어 내 가슴으로 아프게 밀려왔다.
‘그래, 모쪼록 네 사랑을 찾아가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도 모르게 정순을 잡은 손에 꼬옥 힘이 쥐어졌다. 이윽고 나를 돌아보는 정순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날 밤 긴 하루가 너무 고단했던지 정순은 가는 코까지 골며 쉬 잠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단잠을 깨울세라 까치발을 들고 어둔 방을 살금살금 더듬어 나왔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결연히 수화기를 들었다.
영호냐? 그 동안 밥은 잘 챙겨 먹었니? 에미 내일 저녁때쯤 집에 도착할 게다. 그나저나 너 그거 아냐? 포기라는 말은 배추를 셀 때만 쓰는 게 아니라 미련한 부모가 쓸데없는 고집을 버릴 때도 쓴다는 것 말이다. 늦었다, 그만 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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