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걸린 시계의 긴바늘이 12 숫자 위에 서 있고, 그 보다 짧은 바늘은 11이라고 표시된 곳에 머물러 있다. 일찍 온다고 했는데. 저 시계 바늘이 앞으로 더 전진해 가지말고 그냥 저 위치에 멈추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울화가 목구멍을 올라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다. 난 뭐야! 허구 헌 날 애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집안 청소에 빨래, 허리가 휘어지고 있다. 집안 일은 해도해도 끝도 없는 일. 옛날처럼 우물가에서 빨래하지 않고 걸레 빨아가면서 집 청소 안 한다고 하지만 집안 일은 정말 끝도 없고 아무런 표시도 안 난다. 그렇다고 그냥 두면 단번에 집안과 식구들의 옷 모양이 말이 아니다. 사내아이들이라 집안을 어질러 놓을 줄은 알아도 어디 하나 치우는 일이 없다.
여보, 도라지 무침에 식초가 너무 많이 들어갔어.
엄마, 이 미역국 맛없어. 저번 식당에서 먹은 것 참 맛있던데.
김치 너무 매워 못 먹겠어, 엄마.
남편과 아이들의 반찬 투정이라도 안 받았으면 좋겠다. 나는 요리엔 취미가 없다. 아니 음식 만들고 할 시간에 애정 소설 한 페이지 더 읽었다. 그런 내가 여기 와서 음식 재료까지 다르다 보니 더 신경이 간다. 아이들은 매일 햄버거, 남편은 외식을 하고 들어온다. 그러니 신경 써가면서 음식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더 없어진다. 미국에 오면 남편도 일찍 귀가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 전공도 살릴 수 있고 가정의 안락한 평화도 가질 수 있다고 큰 소리쳤던 남자.
낯선 환경에서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10여 년이란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나의 꿈은 고무 풍선처럼 푸른 창공으로 날아 가버리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은 여름이면 멀리 여행도 떠나고 또는 이 삼일씩 캠핑도 하고 오는데 난 아직 그런 재미도 한번 가져보지 못했다. 몇 년 전 남편 직장 동료들과 요세미티 공원 한번 갔다온 것이 전부다. 나는 그때 그 곳을 구경하면서 이 아름다운 절경을 캠퍼스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이젤을 준비해 놓고 그 동안 잠자고 있던 나의 꿈을 깨우고 싶었는데 그 일마저 실천을 못하고 있다. 그 장소에 안 가봤으면 내 마음의 고통과 꿈에 대한 미련을 버렸을 것인데. 지금도 나는 그곳을 찾아 캠퍼스 위에 오묘한 물감을 칠하고 있는 꿈을 꾼다. 정말 이곳은 꿈속의 나라일까? 이것은 완전 생활의 노예에 불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그냥 안 넘어 갈 거야. 늦어지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셀룰러폰은 자랑으로 가지고 다니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 전화로 알고 받지 않으려고 한동안 뜸을 들이다 수화기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여기는 상항 방송국 ‘한밤의 산책’ 프로 담당자입니다.
남편은 아니었다. 다소 앳된 음성으로 다가왔다. 나는 긴장이 되면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방송의 낮 프로그램은 몇 번 들어봤다. 늦은 밤에 이런 프로가 있는지 몰랐다.
밤이 늦은 줄 알지만 프로 특성상 전화를 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잠시 후 묻는 말에 부담 없이 대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부인의 말이 직접 전파를 타고 나갑니다.
무슨 질문을 할까? 내 말이 밤의 공기를 타고 각 가정으로 흘러간다고 하니 긴장이 된다.
지금 밖에는 안개가 자욱합니다. 일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부인께서는 안갯 길을 걸어 본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빗속은 걸어 봤지만 안갯 길은...
그럼 이곳 샌프란시스코의 안개의 내력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그냥 안개의 도시, 바람의 도시, 언덕의 도시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네. 이곳의 안개는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2세기 동안 유럽의 항해사들이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수시로 피어나는 곳입니다. 어느 날 멕시코의 한 어부가 조그만 배를 타고 흘러 들어온 곳이 오늘날 세계적인 항구가 되었습니다. 만약 남편이 지금 이 시간에 다른 여자와 안갯 길을 걷고 있다고 하면 부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요. 질문을 잘못하셨네요. 지금 차 속에 있다고 셀룰러폰이 왔는데요.
네, 그렇군요. 제 질문이 빗나갔군요. 그런데 만약 댁의 남편이 밤늦게 들어오면서 안개꽃을 한아름 안고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즉 그냥 고맙다고 말할지, 포옹을 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키스를 한다든지. 어떤 행동을 취 할 수 있을까요?
물론 키스를 해 줘야죠. 이런 안갯 길속에서 부인을 위해 꽃을 사오는 그런 남자가 최고가 아닐까요.
그럼 부인께서 그 동안 남편한테서 얼마나 많이 꽃을 받아 보셨습니까?
나는 잠깐 망설여졌다. 내 기억에 연애 할 때부터 지금까지 꽃 한번 받아본 기억이 없다.
생각해 보니 없는 것 같네요.
지금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있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어느 시인은 말했다. 안개꽃을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꽃의 모양과 색깔이 달라 보인다고. 내가 기쁜 마음으로 안개꽃을 바라보면 밝고 맑게 보이고, 내 마음이 우울하고 착잡하면 안개꽃도 우울하게 나를 바라본다고 했다. 지금 내가 안개꽃을 받으면 어떤 모양으로 보일까? 남편이 이런 날 무드라도 잡을 줄 알면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까. 그런 것을 바라는 내가 어리석은 여자지.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밤 안개가 밀려오고 있다. 집 앞 가로등이 안개 속에서 연꽃처럼 부옇게 피어나는 듯 보였다. 집 앞 파킹 장으로 붉으스름한 불빛이 움직이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남편이 무엇을 가지고 내린다. 나는 현관문 쪽으로 발을 옮긴다.
오늘은 꼭 따질 거야. 그리고 나의 일을 하겠다고 선언할 거야.
나는 현관문 앞에 탁 버티고 섰다. 손잡이가 돌아가면서 문이 열리고 하얀 꽃 속에 빨간 장미 한 송이가 꽂혀있는 꽃다발을 한아름 들고 남편이 불쑥 들어섰다. 조금전 어금니를 앙 다물고 있던 나는 남편 앞으로 몸을 던지면서 그의 따스한 입술을 찾았다.
그 동안 당신한테 무관심한 것 용서를 받고 싶어. 이 꽃 받아 줘.
난 지금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몰라. 가정을 먼저 생각 좀 해줘
그래, 내 그동안 미안했어.
당신, 혹시 오다가 라디오들은 것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남편은 나를 끌어안으면서 팔에 힘을 주었다. 나도 속으론 아무려면 어때 하면서 남편의 목을 더 힘껏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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