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이학년 때 가장 하기 싫은 숙제는 ‘그림일기’였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매일매일 똑 같은 일상 속에서 일기 쓸 거릴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날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 갔다 오고, 만화영화 보고 숙제한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이걸 일기에 쓰면 선생님께 혼나고, 정말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쓸 만한 것이 없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일기 쓸 거리가 너무 많이 생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아침에는 앞집이 이사를 오고, 저녁에는 아버지께서 통닭을 사오고, 밤에는 책상 밑에서 잃어버렸던 좋아하는 지우개를 찾는 등, 하루가 늘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채워지기도 했다.
공책 한 쪽짜리 분량의 그림일기에 그 걸 다 쓸 수는 없었다. 결국 기록되지 않고 잊혀져 버리는 일들이 있었다.
일기거리가 없어 고민인 날은 그렇게 쓸 거리가 많았던 날이 그리웠다. 마침내 어린 나는 나름대로 요령을 찾아내었다. 쓸 거리가 많은 날, 다 못 쓴 일들을 다른 곳에 적어놓았다가 쓸 거리가 없는 날 쓰는 것 이었다. 이 요령을 터득한 후, 나는 꼬박꼬박 일기 숙제 잘 해가는 착한 학생이 되었다. 선생님도 집에서 있었던 일을 쓰는 이상, 그 일이 언제 일어났는 지 알 수 없으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오신 엄마가 내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너, 거짓말로 일기 쓰고 그러니?” 담임선생님께서 혼자서도 이렇게 일기 숙제를 잘 해 온다고 엄마에게 내 일기장을 보여 주신 것이다. 최근 집에서 일어났던 일은 엄마가 모두 잘 알고 있으니 모두 사실과 안 맞을 수 밖에.
그 땐 난 억울했다. 거짓으로 꾸며낸 것은 아니고 다만 일어난 날짜가 안 맞을 뿐인데. 엄마는 요즘도 농담처럼 그 때 일을 말씀하신다. “얘가 그 때 일기를 만들어서 썼대” 난 아직도 억울하다. 만들어서 쓴 데 아니라, 나누어서 쓴 것이라니까.
어른이 된 지금, 어릴 적처럼 매일매일 써야 하는 일기 숙제는 없지만, 여전히 반복되는 일상의 무의미함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료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물론 어떤 날은 좋은 일이 생겨서 오늘 하루 해가 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나쁜 일이 연달아 터져서 저녁이 되면 털썩 주저앉아 꺾인 무릎을 영 일으키지 못 할 것 같이 느끼기도 한다.
일상이 너무 의미 없고 무료할 때면 어릴 적 그림일기처럼, 좋은 일 갈무리 해 놓았다가
하나씩 끼워 넣었으면…..하는 상상을 해 본다. 그러면 나쁜 일이 일어난 날은? 그 날의 페이지는 부우--욱 찢어 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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