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달, 귀뚜라미, 단풍, 낙엽 - 이러한 말만들어도 우리는 시정(詩情)까지는 몰라도 우리를 감상(感傷)에 젖게 한다. 한적하다는 사람도 있고 울적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단풍(丹楓)과 낙엽(落葉)은 우리가 읽어온 시(詩) 속에서 가장 많았던 시제(詩題)였다. 수심(愁心)이라고 할 때 수(愁)자가 가을 추(秋)와 마음 심(心)의 합성어인 것도 묘하다.
어느 외국 사람이 한국에 살면서「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고 한 신비를 몇 년 동안 찾지 못하다가 내장산(內藏山)의 오색 단풍을 보고 비로소 그 신비를 찾았다는 얘기가 있다. 동부 테네시주 ‘스모키’에서 ‘아파라치안’으로 이어진 계곡에도 단풍 철에는 인파가 꽤 모인다. 내장산의 단풍 같지는 않아도 제법 풍악(楓岳)이라고 할만하다.
남에서 북으로 전해지는 꽃소식과는 달리, 단풍소식은 북에서 남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과 함께 내려온다. 그래서인지 지금 멤피스는 골목골목마다 단풍 든 나뭇잎과 짙은 노랑색 은행잎이 낙엽과 함께 한참이다.
봄에 푸릇푸릇하다가 여름에는 진 푸른색으로 변하고, 가을이 되면 붉게 혹은 노랗게 물들다가 급기야는 낙엽이 되어 흙으로 되돌아간다. 이렇듯 초록이 지쳐 단풍이 되고 단풍이 지쳐 낙엽이 되는 이치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어느 문학 소녀는 바람 한 점없이 지는 낙엽을 보고 시제(詩題)가 떠올랐다 하고, 어느 프랑스 시인은 낙엽이 땅에서 음산하게 굴러가는 소리를 관뚜껑을 덮는 소리로 비유했다. 극에서 극인 것이다.
그런가하면 동양의 어느 시인은 ‘가을은 시름의 계절’이라 하고, 누군가는 ‘가을에는 기도도 해야 하지만 울기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늦가을이 단풍을 만들기 때문이다. ‘가을은 낙하의 계절’이라고 본 것은 미국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을(Autumn)의 대명사는 폴(Fall)이다.
낙엽관(落葉觀)에 대해서 어느 학자는 「서양의 자연관에서 한 잎 가랑잎은 시들어 사라지는 한 잎 가랑잎 그 이상의 그 이하의 것도 아니지만 동양의 자연관은 지는 나뭇잎만으로 보지 않고 그것이 존재하는 근저에 인생관, 더 나아가 우주관을 연결시킨다.」고 했다.
하기야 그렇다. 「낙화(落花)인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하리오」이런 시조가 있듯이 낙엽도 낙화와 다를바 없다. 쓸지 않고 두어도 언젠가는 어디론가 날아가 거름이 되어 우주 순환 속에 한 분자가 된다. 그래서 절 경내에서는 진 가랑잎을 쓸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너무 지쳐있다. 살기 위해 경쟁을 하는데 익숙하지, 자연을 관조(觀照)하는데 서툴다. 앞서 가려고만 했지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없다. 이 모두가 대도시가 주는 일종의 해악이다. 그러다보니 포장도로에 떨어진 낙엽은 그냥 낙엽이지 거기에 무슨 뜻이 있을 수 없다.
낙엽으 가을철의 대명사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일년 내내 낙엽을 떨구는 나무가 있다. 소나무의 솔잎이 그렇다. 솔잎의 수명은 2년이다. 잎이 늘 푸른 것은 2년생이 떨어질 무렵 1년생이 청청하니 늘 푸른 상록수(常綠樹)일 수밖에 없다.
솔잎은 하나의 사이 눈에서 두 개의 솔잎이 자란다. 2년간 같이 살다가 같이 대지에 떨어져 부부애를 과시한다. 그래서 윤선도(尹善道)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은 소나무의 변치 않는 절개를 노래하고 음양수(陰陽樹)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곳 미국의 소나무는 한국 소나무와는 달리 하나의 사이 눈에 지조 없이 세 개 또는 네 개가 같이 자라니 아리송하다.
우리 집 담장을 끼고 30년생 큰 소나무 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사시장철 향기로운 송풍(松風)을 접할 수 있어 고맙기는 하지만 하루가 멀다고 솔잎이 보도는 물론이고 지붕 위며 채소밭을 덮어버린다. 비라도 맞고 나면 긁어모으기도 힘들다. 불을 집혀 재를 뿌리고 싶지만 소방소에 미리 알려야 하니 그럴 수도 없다.
초록이 지쳐 낙엽이 되었다함은 잎새의 노화현상으로 잎새가 갈증을 호소함이다. 염녹소가 고갈되어 젖줄이 끊어졌다는 신호인 것이다.
살다 지쳐 단풍이 된 단풍잎, 안간힘을 다하여 떨어지지 않겠다는 단풍잎을 보고 사람들은 곱다고 박수를 친다. 그러다가 지쳐 쓰러진 뒤에는 빗자루로 모질게 쓸어버린다.
어느 시인이 ‘가을에는 기도도 해야 하지만 울기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 살다가 끝내는 가지인 모체에 앙상하게 매달려 서로 놓지 않겠다는 단풍잎인 때문이다.
그래서 선비는 단풍을 보고 정을 품지, 아름답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푸르름이 다하여 단풍이 되듯 인생도 항상 청춘일 수가 없기에 그렇다.
그리고 나무가 가을을 맞아 그 잎을 떨구는 것은 윤회(輪廻)의 한 현상일 뿐 생명이 다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세월 따라, 바람 따라, 낙엽 따라’ 가고 있을 뿐이다.
/ikhchang@aol.com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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