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서 가까이서]
▶ 정태수 <편집국 부국장>
버클리 시의회가 지난 봄 이라크전을 앞두고 반전결의안을 채택한 것은 놀랍고도 부러운 사건이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비롯한 미국의 수뇌부가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동맹국 지도자들과 금방이라도 한판 붙을 듯 아슬아슬한 입씨름을 벌여가며 ‘이라크 때리기’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있을 때, 버클리가 눈치없이(?) 자기편의 김을 빼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배짱도 놀라웠고 그걸 대수롭지 않게 주워섬긴 미국의 그릇도 부러웠다.
개전 이후, 보다 정확하게는 부시 대통령의 득의에 찬 종전 선언(5월1일) 이후 이라크에서 들려온 소식들을 보면 버클리의 선견지명에 무릎을 쳐야 할지 한 방울 힘이라도 보태야할 마당에 딴죽이나 걸었다고 삿대질을 해야 할지 모를 일이지만 그건 논외로 치자. 요는 버클리를 버클리답게 만드는 전통 혹은 기풍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버클리는 UC버클리가 알파요 오메가인 대학도시다. 그리고 UC버클리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운동권의 요람이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미국 전역 대학가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던 반전운동의 진원지는 UC버클리였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이른바 어퍼머티브 액션(Afirmative Action, 소수계에 대한 일정비율 할당제)이 시행되기 이전부터 당장 점수보다는 앞으로 가능성을 보고 소수계는 물론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대폭 문호를 개방하는 등 ‘열린 대학’ ‘통큰 대학’의 선봉으로 자리잡은 것도 UC버클리였다. 지난달 31일 이 대학 동아시아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해 ‘북핵위기 해소와 동아시아 안전보장 방안’에 대해 기조연설을 했던 한승주 주미 대사 역시 UC버클리 동문이다.
그런데 요즘 UC버클리의 열린 입시정책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잡음이 영 심상찮다. 우선 공격의 주체가 UC평의회, 여간 버겁지 않은 상대다. 공격의 소재 또한 매우 민감하다. 사안의 폭발성 때문에 공격자인 UC평의회도 입조심을 하느라 콕 찍어 표현은 안하고 있지만 속셈은 뻔하다. 점수 나쁜 소수계 수험생들에게 특혜를 주지 말라는 압박이다.
지난달 4일 잔 무어스 UC평의회 의장 명의로 공개된 보고서를 보자. 3만6,445명이 지원해 8,647명이 합격통지서를 받은 2002년 가을 신입생 선발에서 SAT 스코어 1,400점 이상 고득점자 3,000명 이상이 낙방하고 1,000점 이하 386명이 합격(그중 실제 등록생은 233명)됐는데 합격자 전체 SAT스코어 평균은 1,337점이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저득점 합격자 386명 가운데 히스패닉계 43.5%(168명), 흑인 19%(73명), 아시아계 26%(100명), 인디언 1%(4명)로 소수계가 90%를 넘는 반면 백인은 6.7%(26명)에 불과하다는 게 골자다(나머지는 기타). 그러면서 투명성이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투명성이 뭘 뜻하는지 삼척동자도 알 만하다.
UC평의회의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UC버클리가 SAT 스코어는 하나의 척도일 뿐 수험생의 자질을 평가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는 원론적인 반박과 함께 수험생 개개인의 역경극복 여부 등을 참작해 ‘종합적인 검토(Comprehensive Review)’로 신입생을 선발해왔다고 해명하자 UC평의회는 지난달 31일 2차 보고서를 내놓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긍정적인 측면은 애써 감추고 부정적인 측면만 잔뜩 부풀리는 품새가 가관이다.
우선 중퇴율의 경우 저득점 합격자들(10.7%)이 동급생 전체(4.9%)의 2배 이상이나 된다고 이탤릭체로 처리했다. 이번 학기 등록율이 소위 저득점자의 경우 89.3%이고 동급생 전체는 95.1%라고 해야 될 것을 굳이 뺄셈논법으로 그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특혜를 줘가며 소수계를 뽑아본들 공부를 못해 중퇴생만 늘지 않았냐고 은연중 강조했다. 뿐만 아니다. 1,000점 이하 합격자들의 학점(GPA) 평균치(2.7점)와 동급생 전체 평균치(3.18점)도 이탤릭체로 일부러 돋보이게 써놓았다. 또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저득점 합격자들의 88%(동급생 전체는 96%)가 ‘양호(Good Standing)’ 판정을 받았는데도 역시 뺄셈논법을 동원해 이들의 불량판정율이 전체평균의 3배나 된다고 비틀었다.
반쯤 찬 물컵을 두고 아직 반밖에 안찼다는 사람과 벌써 반이나 찼다는 사람의 태도는 분명 다르다. 겉으로는 투명성 확보를 내걸고 있지만 ‘공부 못하는 소수계’를 부각시키기 위해 갖은 잔꾀를 부리는 UC평의회의 꿍꿍이는 훤히 드러났다. 소수계, 보다 정확히 말해 불우한 가정환경 등 역경을 딛고 일어선 수험생들에 대해 더이상 온정을 베풀지 말고 ‘에누리없이 점수대로’ 하자는 것이다. 2차 보고서가 나온 뒤 UC버클리의 매리 펠디 대변인이 즉각 중퇴자들이 가정형편이 안좋아 그만뒀는지 개인적 사정 때문에 그만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UC평의회가 주장하는 저득점 합격자들)이 학업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다고 반박했는데도 UC평의회가 UCLA 등 UC계열 다른 대학으로 ‘전선’을 확대하는 것을 보면 단단히 별러온 모양이다. 피해의식에 젖은 일부 백인들 사이에서 동조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불길한 소문도 들린다.
UC평의회의 소원대로 됐을 경우 한인 등 소수계의 몫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이기적인 우려’에서 하는 소리만은 아니다. 9·11 이후 가뜩이나 ‘우향우 현상’이 심화된 미국에서 그나마 당당하게 딴목소리 혹은 제목소리를 내온 UC버클리마저 우향우를 강요당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UC버클리가 UC버클리다움을 잃을 경우 미국의 건강에도 해로울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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