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타계한 김명한옹… 노인복지·장학사업에 앞장
직계가족 100여명
술·담배 입에 안대
항상 모범시민 강조
6일 103세를 일기로 별세한 타운의 초기 이민자 ‘김방앗간’김명한옹은 유학을 보낸 아들 초청으로 1967년 봄 칠순 가까운 나이에 LA로 이민왔다.
이듬해 제퍼슨 블러버드에서 ‘MK 동양식품’을 시작했고 이민올 때 가져온 떡기계 4대로 1969년 웨스턴가를 거쳐 1973년 서울국제공원(구 아드모어공원)옆 올림픽가에 타운 최초의 방앗간인 ‘김방앗간’을 열었다. 진남포 상공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김옹이 떡기계를 직접 설계해 만든 특허품이었다.
노인들이 모여 담소를 나눌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던 70년대 말엽 올림픽 노인회를 만들어 방앗간 옆에 사무실을 차렸다. 김옹은 이곳에서 매달 노인 잔치를 열어 찾아오는 노인들에게 떡과 여흥을 선사했다. 9월 열리는 코리안 퍼레이드에는 꽃차를 타고 드럼을 두드리는 멋쟁이 할아버지로 기억된다. 지금은 폐간됐지만 일간지 ‘LA헤럴드’가 86년 통판 기사로 김 옹을 ‘한인 노인들의 대부’로 소개하기도 했다.
김 옹은 자손도 번성하고 강건했던 데다가 천수도 누렸다. 18세였던 1918년 결혼해 7남4녀를 두었고 이중 6남2녀가 생존해 있는등 직계가족이 100여명 이르고 있다. 자녀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내 한국에서 부부가 장한 아버지·어머니 상을 받았다.
평소 김 옹은 “우리는 모범 시민이 되자”를 자손들에게 가르쳤다. 올바른 가정과 좋은 시민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며 “축복의 땅 LA에서 한인끼리 돕고 사는 것에 늘 감사한다”고 입버릇 처럼 말해왔다.
김 옹은 2세들을 위한 장학사업도 했다. 한미장학재단 내 ‘김명한 지정 장학금’, 4남 김기순씨의 모교인 칼폴리에 2만 달러의 장학금도 기증했다. 4년 전 아호를 딴 ‘남용 재단’이 설립돼 노인 공경 잘하고 봉사하는 대학생들을 뽑아 1,000달러씩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1세기를 살아온 김 옹의 건강 비결은 술·담배를 일절 하지 않는 절제하는 생활과 지난해 골절상을 당하기 전까지 매일 6시에 일어나 방앗간 문을 직접 열고 닫으며 기계까지 손수 고칠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떡방아가 돌아가고 깨볶는 냄새가 고소하게 배어나는 방앗간에 앉아 멜빵을 어루만지며 오고가는 손님들과 말벗이 되어주던 김 옹의 모습은 한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돼 있을 것이다.
<김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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