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주동 인물로 3족이 멸하는 고난을 겪었으나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 신문을 창간하며 근본적인 개혁을 온 몸으로 실천했던 서재필은 120년이 지난 후에도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어떤 인물로 부각되고 있는가?
원로 정치학자 이정식(73. 펜실베니아대학 명예교수)박사가 2년에 걸쳐 저술한 ‘구 한말의 개혁 독립 투사 서재필’ 출판 기념식이 지난 23일 노스 필라에 있는 서재필 병원 강당에서 열렸다. 이 박사는 1984년에 ‘서재필 : 미국 망명 시절’이라는 책을 썼는데 서울대 역사학과의 김용덕 교수가 이를 재판하도록 권유해 연강 학술 재단의 재정 도움을 받아 서울대학
교 출판부에서 437페이지 짜리 단행본을 출판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 박사는 이 책에 서재필의 전기뿐만 아니라 구한말이 왜 허약하고 망하게 됐던가, 일본이 왜 한국을 삼키게 됐는가, 고종과 민비 사이에서의 서재필의 개혁 운동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이정식 박사는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 3족이 죽임을 당하는 처참함을 당한 서재필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의사가 된 뒤 11년 만인 1895년 귀국해 독립 협회 조직, 독립 신문 창간, 독립문 건립 등 개혁 조치를 시행했다면서 그러나 결국 친러 정권과 고종의 미움을 받아 2년 반 만인 1898년 5월 다시 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나야 했다며 개혁
의 미완성을 아쉬워했다.
이 박사는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 돌아와 1919년 3. 1운동에 자극받아 1차 한인 연합 회의를 개최하고 ‘Korea Review’를 발간하면서 한국의 실상을 알리는 외교 활동을 펼쳤다고 그의 공적을 지적했다.
한편 이정식 박사는 서재필에 대한 비난에도 적극 대응했다. 서재필이 1898년 2차 망명을 떠날 때 빈한했던 한국 정부에서 퇴직금 조로 거금 1만 4,400달러를 받은 것이나 친일 내각을 이용해 독립 신문을 발행했고, 이를 일본 정부에 팔려고 했던 것은 매국적인 행위로 비난을 받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이 박사는 서재필은 그 자금으로 1919년 3. 1운동 직후 필라에서 한인 연합 회의를 개최했으며 독립 신문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매입 제의한 것을 거절하고 일본과의 교섭도 이뤄지지 않아 윤치호에게 맡겼다고 말했다.
이날 출판 기념회에는 춘원 이광수의 딸 이정화 씨와 홍준식 전 서재필 재단 회장, 김승욱 필라 연합 교회 목사, 짐버만 전 브렌모어 대학 교수 등 80여명이 참석했다. 언론인 이상순 씨는 516개의 주석을 달 정도로 치밀하게 고증한 저술이라면서 이정식 박사가 몽양 여운형 일대기를 저술중인 만큼 근대 한국사를 파헤치는 작업을 계속해 달라고 격려했다.
<홍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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