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접을수 없는 ‘상봉의 꿈’
6월25일은 전쟁을 경험한 세대에게 아프고 쓰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더구나 북한에 가족을 남기고 온 이산가족들은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다시 한번 몸서리친다. 한국전 발발 55년이 지나는 이 때 ‘가족과의 상봉’만을 꿈처럼 그려오던 그들이 가지는 감정은 각별하다. 이젠 칠순, 팔순을 훌쩍 넘어 ‘남아있는 시간’이 충분치 않은 이들은 매년 다가오는 6월25일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시계추 같다. 미국에 건너와 기약 없는 고향방문의 꿈을 접을 수 없는 그들의 망향가를 들었다.
◇장봉현 (78·평안남도 독천)
1950년 11월 인민군이 후퇴할 때가 돼서야 전쟁 사실을 알게 됐다. 집안의 유일한 젊은이었던 나는 만약에 대비해 가족과 동생들을 남기고 산으로 숨었지만, 국군 8사단 21연대 수색대에 체포돼 그 때부터 전선을 따라 노무자로 사역하는 신세가 됐다. 1·4후퇴 때 경상도로 밀려 내려간 후 이후 다시 이북 땅을 밟지 못했다. 남동생 1명과 여동생 3명이 살아있을 텐데 생사라도 알고 죽었으면 좋겠다. 추석이나 설이 되면 고향 생각에 눈물을 많이 흘렸다.
◇김왈실 (78·평안북도 영변 어리면)
19세에 이북서 결혼하고 전쟁이 나기 전 서울로 내려왔다. 남동생 왈성이가 편지하라고 하던 음성이 생생하다.
어머니, 아버지, 오빠, 언니와 남녀동생들까지 아직까지 살아있을 것만 같다. 여의도에서 있었던 이산가족 찾기에도 나가 봤지만 찾지 못한 걸 보면 전쟁 때 피난 내려오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너무 지나 잘 기억도 안 나지만 그래도 한번 보리란 꿈을 접을 수는 없다.
◇안정녀 (84·함경남도 전평군 전평면)
우리 동네는 ‘소끝’이라고 불렸다. 광복 후 자식들 데리고 서울로 나왔는데 전쟁이 터졌다. 엄마 없이 외갓집에서 자라나 친지는 거의 없지만 지금쯤은 외할머니는 돌아가셨을 것이고 나보다 위로 두 살 터울인 외삼촌 김성주씨는 생존해 계실 것 같다. 이복동생이던 두남(76)이도 어찌 됐는지 궁금하다. 한국에 친지도 없고, 어떻게 이산가족을 찾아야 할지 몰라 그냥 마음에 두고 덮어왔지만 항상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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