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안나는 방년 18세다. 비행장까지 가는 동안 안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삼촌도 내내 침묵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안나가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무거운 삼촌 밴은 시끄럽게 소리를 내고 달렸다. 삼촌이 헐떡거리며 커다란 트렁크 두 개와 바이올린 박스를 겹쳐들고 개찰구로 갈 때, 안나는 작은 북백을 손에 들고 유유자적하며 천천히 걸어왔다. 수속이 끝나자 안나는 인사도 없이 승강구로 사라져 버렸다.
삼촌은 돌아가는 길에 지난 1년의 고뇌를 차근한 마음으로 되새겨본다. 형수가 갑자기 뉴올리언스에서 전화로 안나를 잠시만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안나는 이름난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은 지도 꽤 오래됐다. 그 아이를 공립학교로 보내고 싶다고 할 때 삼촌 짐작으로 엄청난 학비 때문이려니 생각으로 쾌히 승낙했다.
안나는 까만 작업복 상하에 하얀 배를 드러내놓고 핑크색 물감으로 들인 짧은 머리를 하고 왔다.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린 쇠사슬들이 허리며 손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삼촌은 놀란 포정을 감추려고 그냥 웃기만 했다. 10년 전에 보았던 맑고 큰 눈에 흰 살결, 까만 머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삼촌 동네의 공립학교는 쉽지가 않다. 11학년은 더욱 그랬다. 안나는 늘상 아침시간에 늦었다. 엄마가 렌트 해준 차는 삼촌이 직장에서 올 때면 집 앞에 없었다. 친구 집에서 공부하고 놀고 온다고 했다. 안나의 머리는 더욱 산발이 되어가고, 옷은 끌리는 바지에 더욱 처져 내리고, 검정색 윗도리는 그 아이 얼굴을 더욱 어둡게 했다. 보내온 성적표는 수학과 자연 과학만 A를 받고 나머지 과목은 incomplete를 받아왔다. 졸업반이 되면서 안나는 새벽처럼 나가는 삼촌이 몇 번씩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삼촌은 겁이 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혹 이 애가 약을 복용하는 것일까. 다 성장한 아이에게 꾸지람을 하는 것보다 격려를 해야지 하며 한번도 화를 내지 않던 삼촌은 안나가 사흘씩 집에 돌아오지 않자 꼬박 뜬눈으로 새고 그날로 한국에 전화를 했다. 더 이상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안나는 새벽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귀국했다.
삼촌은 자신을 돌아봤다. 학교가 가기 싫어서 3년이나 쉬고 검정고시로 간신히 대학을 갔다. 군대를 마치고 미국에 이민 와서 모드들 가는 대학도 가지 않고 세탁소에서 청년기를 몽땅 바친 자신을. 형은 미국서 학위를 마치고 고국의 유명 기업체에 스카웃되어 임원이 됐고, 형수는 수련의를 마치고 잘 나가는 개업을 한다니.
무던히도 더운 어느 날, 삼촌은 차고 앞에 놓인 작은 소포를 열었다. 흰색 고무신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깨알같이 쓴 안나의 편지가 있었다.
삼촌, 미안해요. 매알 같이 아침을 만들어주고, 지저분한 방을 치워주시고, 제가 밤 늦게 돌아올 때마다 꼬박 밤을 새우셨던 삼촌, 아무 말도 안 하시고 제 빨래도 해주시며...저는 이제 딴 사람이 됐어요...저는 내일 중국으로 가요...삼촌이 읽던 책을 저도 보고...나환자 정착 마을을 찾아서. 일할 때 시원하라고 고무신을 보내요.
그날 밤 오랜만에 형은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흥분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야, 안나가 만점이야. 국제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했어.” 삼촌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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