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의 멋쟁이 흑인 부부가 차를 몰고 가다 백인 경관에게 검문 당한다. 취중운전도 아니고 난폭운전도 아니다. 단지 흑인이란 이유 때문에 의심받아 차가 세워진 것이다. 입에서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데도 흑인은 코 잡고 걷는 취중운전 테스트를 받는다. 백인 경관의 모욕적인 검문태도를 보다못한 부인(흑인)이 항의하자 이번에는 부인도 몸수색을 당한다. 경관은 총기를 찾는 척하며 매력적인 이 흑인 여성의 온몸을 만진다. 여성이 항의할수록 경관은 공무집행 방해죄라며 점점 더 심하게 다룬다. 남편은 속이 끓어오르지만 참는다.
집에 돌아온 부인은 자신의 몸을 더듬는 것을 항의 한마디 없이 옆에서 지켜보기만 한 남편을 지성인이라기보다는 못난 남자로 취급한다. 남편은 부인이 경관에 대들었기 때문에 문제가 더 커진 것이라며 그녀의 겉 똑똑함을 꾸짖는다. 두 사람의 이견은 마침내 남자의 콤플렉스를 자극해 나중에 남편이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상은 올해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영화 ‘크래쉬’(CRASH)의 시작 장면이다.
‘크래쉬’는 인종갈등이 자아내는 미국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 흑인과 백인, 멕시칸, 아랍인, 중국인과 한국인까지 등장시켜 인종 선입견이 어떤 불행을 자아내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인종폭동이 두 번이나 일어난 LA를 무대로 하고 있어 실감이 가지만 코리안을 약간 우습게 그린 것이 유감이다.
도시인들은 모두가 모두에게 짜증스러워 하면서 지낸다. 영화의 한 백인 여성은 “나는 항상 분노하고 있다.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자신이 쌓아올린 마음의 벽 때문에 가슴이 뛰고 초조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증상이다.
사람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으며 누구나 가슴속에 악마와 천사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선과 악이 싸우는 전쟁터가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인종차별 백인 경관도 집에서는 중병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정성스레 간호하는 효자다. 나중에는 화염에 싸인 자동차에 뛰어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흑인 여성을 구한다. 목숨을 건진 사람은 며칠 전 불심검문에서 자신이 몸을 더듬던 바로 그 흑인 여성이다. 악마처럼 보이던 백인 경관이 이번에는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오자 흑인 여성도 자신이 쌓아올린 인종편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누구든지 상황에 따라 지킬 박사가 되었다가 하이드도 되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살인자도 집에 돌아오면 착한 아버지다. 도둑도 자기 아들보고 “도둑이 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이웃에게는 더 할 수 없이 교양 있게 비치는 여성이 집안에서는 멕시칸 가정부에게 인격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인간의 사물판단은 주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범위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경험도 한정될 수밖에 없고 여기서 남을 보는 시각에 편견이 생긴다. 알고 보면 다 착한 사람들이다.
올해 오스카 작품상이 ‘브로크백 마운틴’에 돌아가지 않고 ‘크래쉬’에 주어진 것에 대해 논란이 많다. 그러나 상을 준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격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동성애보다는 인종편견을 없애는 것에 대해 격려를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꿩 대신 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다 치더라도 ‘크래쉬’가 작품상을 받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이민자들에게는 매우 교육적인 영화다.
이 사
c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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