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윤혁은 바람이 부는 날은 단단히 몸을 묶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애틀란타에 있는 고층건물은 거의 그에게는 낯설지가 않다. 미국에 이민 온 지 6년 동안 한 일이란 높은 건물 유리창을 닦는 일이었다. 그가 매일같이 맘에 다짐하는 것은 절대로 하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땅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 것이다.
윤혁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다. 온순한 성격의 그는 너무 겁이 많아서 한때 유행하던 철봉에 매달리는 것도 마다했다. 7형제 중 4째로 무난히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문리대에 입학했다. 그칠 날이 없는 교내 교외 데모에도 일절 참가치 아니하고, 의지를 잃은 대학생활이 지겨웠다. 일찌감치 군대를 마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지겨운 논산훈련소 기초훈련을 마치자 대대장실로 불려갔다. 사복을 입은 말끔한 신사가 대대장 의자에 앉아서 가족사항 등을 차근히 물었다. 그날 오후 그는 군복을 벗고 몇 사람의 동행인과 같이 기차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이름도 없는, 계급장도 없는 부대에서 2년간 잠수, 산악, 폭파, 지뢰, 무선 기타의 집중훈련을 받게되었다. 일절 휴가며 면회가 금지됐다. 집에 편지만은 허락되었지만 주소나 군무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야했다. 훈련이 끝나고서야 윤혁은 자기가 이북에 보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에게 심한 혼란이 왔다. 그는 며칠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윤혁은 자기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것이다. 내가 삶의 의지를 갖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윤혁이 다시금 그 말끔한 신사에게 불려 갔을 때 그는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 많았네. 자네는 운이 좋았네. 이북에 갈 필요가 없어졌네”라고 했다. 윤혁은 일절 그의 군 경력을 밝히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고 제대를 했다. 윤혁은 진실로 살고 싶어졌다. 미국 이민수속을 했다.
누나는 애틀란타에서 리커스토어를 했고 카페도 운영했다. 윤혁은 낮에는 고층건물 유리창을 닦고 밤에는 카페에 나가서 웨이터를 했다. 미국에 온 후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많은 직업 여성들이 카페에 들렀다. 날마다 그들의 슬프고 비참한 이야기를 들으며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가족같이 여겨졌다.
윤혁은 가장 높고 힘든 고층건물의 하청을 따냈다. 새벽같이 그 높은 빌딩 꼭대기에 올라서 아래로 보이는 대지를 바라보며 꿈을 키워갔다. 언젠가는 이 미국 땅을 많이 소유해야지, ‘한국인 콜럼버스’가 되는 것이다. 윤혁은 버는 돈으로 주변 도로변에 나온 땅을 차근히 사기 시작했다. 직업여성들에게도 땅을 사도록 도와주었다.
밤일을 마치고 매일같이 국도와 지방도로를 돌며 희망 있는 지역을 보느라 푹 쉬지 못한 탓인지 아침에 밧줄을 잡은 손이 떨려왔다. 어제는 안 먹던 술도 선배의 강요로 한잔 먹은 것이 탈일까. 윤혁은 빠른 솜씨로 30층에서 7층까지 내려왔다. 이제 몇 층만 더 내려가면… 할 때 무슨 일인지 밧줄이 미끄러져 내렸다.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들자 누나가 영어로 마구 화를 내면서 야단을 쳤다. “너 미쳤니, 미쳤어?” 병실 바깥까지 눈에 익은 여인들이 꽃다발을 들고 환히 웃고 있었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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