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칸이 없는 하루’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에서 멕시칸이 없어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그린 코미디다. 정육공장이 마비되어 고기가 수퍼마켓 진열대에서 사라지고 야채 값이 치솟자 주부들이 아우성이다. 베벌리힐스의 고급식당 주인은 손님이 먹고 간 접시를 닦다가 지쳐 식당 문을 닫는다. 부유한 집에서는 가정부가 없어지는 바람에 아이들 런치를 싸줄 사람이 없어 남편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나섰으나 부엌기구가 어디 있는 줄 몰라 아내와 말다툼을 벌인다.
노동력이 모자라는 현상이 일자 멕시칸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길에 지나가면 백인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싸우고 마침내는 ‘멕시칸들이여 제발 돌아 오라’는 사인판이 거리에 나붙는다. 이 영화의 일품은 마지막 장면이다. 티와나 국경선 담을 넘은 멕시칸 2명이 이민국 경비대원에게 붙잡히자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이때 숲 속에서 백인들이 튀어나와 경비대원들과 함께 “멕시칸 만세!”를 외치면서 반긴다. 어이없어 우습기는 한데 뭔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이번 라틴계의 ‘메이데이 보이코트’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냐를 놓고 추측이 많기 때문이다. 영화 ‘멕시칸이 없는 하루’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사실 라티노는 미국에서 제1의 마이너리티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흑인 커뮤니티와는 대조적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서 ‘보이는 사람들’로 잠수함처럼 수면에 떠오른 것이다.
원래 ‘메이데이 데모’는 라티노가 미국에서 얼마나 큰 경제적 파워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생각보다는 주류사회에 대해 경제적인 쇼크가 덜했다. 주류에게는 반감을 부채질한 면도 있다. 오히려 데모의 위력을 실감한 당사자는 LA의 코리아타운이었다. 식당도 문 닫고 봉제업소도 완전 휴무인데다 리커스토어도 파리를 날릴 지경이었다.
코리안 커뮤니티가 놀란 것은 라티노의 보이코트가 미국의 대기업보다 중소기업과 영세 상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과 방대한 라티노 시장이 한인 비즈니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 점이다.
그러나 라틴계의 5.1 데모가 백인 정치인들에게 보여준 것이 있다. 앞으로 미국에서 실시되는 대통령, 주지사, 연방 상원의원, 시장 선거에서 라틴계의 지지를 잃는 후보는 당선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라틴계 유권자는 전국적으로 800만명이다. 부시와 앨 고어의 표 차이가 54만표였고 플로리다에서의 재개표 결과 537표 차이로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을 감안할 때 라틴계가 모든 선거에서 입김을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캘리포니아 인구의 33%, 뉴멕시코주 주민의 43%가 라티노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라틴계가 당선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되었다.
메이데이 보이코트 다음에 오는 라틴계의 움직임은 무엇일까. 유권자 등록운동이다. 미국에서는 표가 말하는 것이지 데모는 별로 효과가 없다. 주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라틴계의 결집된 표의 힘이다. 이번 데모로 라틴계 커뮤니티 내에서 유권자 등록을 해야겠다는 자각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라티노 스스로가 자신들의 잠재력에 놀랐기 때문이다. LA 코리아타운을 지나는 어느 라티노가 이런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Today We March, Tomorrow We Vote”.
이철 이사 c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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