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가을 어느 날 책 한권이 나의 사무실에 배달되었다.‘침묵으로 지은 집’이라는 소설인데 저자는 동국대학교 C교수였다. C교수는 신문사에서 나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여기자 출신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이 소설은 6.25 월북자 및 부역자 가족들이 겪고 살아온 고통스런 과정을 담은 것으로 아버지 때문에 2세들이 사회에서 눈치 보며 살아온 뼈아픔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C교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침묵으로 지은 집’은 우리가 지금까지 그러려니 하고 무심히 보아온 세상을 여러 개의 프리즘을 통해 확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읽는 사람들에게“이런 세상도 있었구나”하는 느낌과 함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까 과거 C교수가 직장에서 보였던 여러 가지의 미스터리적인 자세에 대한 나의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했다. ‘침묵으로 지은 집’에는 굴비로 유명한 전라도의 어촌 영광에서 6.25를 전후하여 일어난 비극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인간은 사상전을 통해 동물보다 더 잔인한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빨갱이로 몰린 가족들이 살아남기 위해 겪어야 하는 인간의 수모, 가족끼리도 피하는 가족의 과거 스토리, 항상 숨기고 살아가는 신분문제 등이 날카로운 시각으로 그려져 있다. 그들의 유일한 피난처는 침묵이었다.
지난주 한국의 재심법원이 32년만에 인혁당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날 판결문이 낭독되자 이미 사형이 집행된 8명의 관련자 유가족들은 늦게나마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준 데 대해 감격스러워 하면서도 피고인들의 억울한 죽음과 ‘간첩 가족’으로 낙인찍혀 살아온 긴 시간은 “억울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된다“며 통곡했다.
인혁당 사건이란 73년 학생들의 유신반대 운동이 격화된 상황에서 반유신 유인물이 민청학련 명의로 떠돌자 주동자들을 인혁당과 연계해 공산혁명을 기도했다며 군법회의에서 사형언도를 내린 후 대법원에서 확정돼 판결 18시간만에 전격적으로 사형 집행된 사건을 말한다.
사형 받아야 할 죄를 지었으면 사형 받는 것이 법의 정신이다. 그러나 피고인들이 고문에 의해 있지도 않은 죄를 고백하고 재판절차에 큰 하자가 있었던 것이 이 사건의 문제며 그래서 대표적인 ‘사법살인’ 케이스로 불린다. 그때 사형언도를 받았던 이철씨는 지금 철도청장이다. 그가 도망 다닌 것이 목숨을 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청장과 동명이인이었기 때문에 해외여행 때마다 공항에서 억류되는 불편을 겪었고 지방출장 가서도 여관 숙박부에 이름만 올려놓으면 경찰관이 찾아와 귀찮은 질문을 던졌던 기억이 난다.
당시 판결을 맡았던 법관들과 언론에 대해 정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게오르규의 25시’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달걀로 바위를 친다는 말이 있지만 바위조차 없는 상황에서는 내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의 개념조차 막연할 때는 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인간이 인간의 잣대로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준 것이 인혁당 재판사건이다. 인간의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래서 남북전쟁이 끝난 후 남군을 정죄하지 않은 링컨이‘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것이다.
<이 철>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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