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열사는 1902년 3월15일 충남 천안에서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씨 사이에서 다섯 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 재학하며 방학 중에는 고향에 내려와 문맹퇴치에 진력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의 붕어로 민족감정이 폭발되자 고종의 장례를 이틀 앞둔 3월 1일 역사상 최대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유열사는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 천안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유림대표를 만나 설득했다.
4월 1일 정오 아우내 장터에서 거사키로 약속이 되고 3월 13일 매봉산에서 거사를 재확인하는 봉홧불을 올렸다. 시위 당일에는 아우내 장터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밤새워 손수 그린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 운동’의 선봉이 됐다. 4월 1일 약 3,000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일본헌병들은 무차별사격, 수십 명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유열사의 부모님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열사의 집마저 불태워져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됐으며 집은 1991년 12월 30일에야 복원되었다. 유열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천안헌병대로 끌려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 후 7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됐다. 수감생활 중에도 옥중 독립만세를 부르다 1920년 10월 12일 18세에 순국했다.
유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의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30년경 일제의 도로건설로 흔적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열사의 생애는 짧았지만 진정으로 그 애국의 혼은 영원히 남아 민족의 가슴속에 빛날 것이다.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무 것도 사랑할 수 없다’는 바이런의 말을 생각해본다.
<임경철> 재미 태극기 보존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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