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6일은 이승만 박사 탄생 132주년이 되는 날이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전임대통령들의 긍정적인 업적을 교과서에 담아 후세들에게 가르치고 있건만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민족의 자부심을 내세우면서도 우리들의 역사를 우리들 자신이 폄하하고 왜곡하고 있지 않나 되돌아 볼 때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분만큼 잘못 알려지고 폄하 당하는 지도자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1968년 단 50달러를 손에 쥐고 LA에 정착하여 이승만 박사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동지회’에서 생활하면서 그 어른에 대한 위대함을 공부했다.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이 되기 전 이미 50년 동안 민족의 나아갈 바를 밝힌 선각자였다. 구한말 최초의 언론인으로서 폐쇄되고 낙후됐던 은둔의 왕국을 근대적인 민주국가로 바꾸려고 투쟁했던 민족의 횃불이었다.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임시 대통령으로 나라를 빼앗긴 40년 동안 수많은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워싱턴, 런던, 파리, 제네바, 상하이, 모스크바 등을 누비며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해방되었으나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남침하여 우리 국군은 삽시간에 대구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전략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 9.28 서울 수복의 감격을 맞았다.
당시 신생국들의 국가건설은 어려움이 많았지만 남북분단과 6.25 전쟁 등 우리나라가 겪어야했던 시련은 그 어떤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런 시기에 이 대통령은 불굴의 구국정신으로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본으로 하는 국가의 기틀을 구축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했던 것이다.
한국에 건국대통령의 기념관을 세우고 그의 모습이 담긴 화폐를 만드는 것이 역사의 순리일 것이다.
<이희덕> 이승만 기념 사업회 미주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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