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에세이 글에 가끔 언급했듯이 우리 산장에 유럽 손님들이 심심찮게 찾아온다. 오늘 네덜란드에서 온 부부를 맞아 그들의 투박한 영어 발음과 내 경상도 영어 발음이 아주 잘 어울려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한국에 가 본적 있습니까? 나는 14년 전에 네덜란드에 갔었습니다”라고 물었더니 그들은 풍차를 보러 왔었냐고 물었다. 내가 헤이그에 가기 위해 당신들의 나라를 방문했었다고 하니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네덜란드는 헤이그가 있는 나라로 알고 있어서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 이준 열사를 생각하게 된다. 3월은 민족 자존심인 3.1절이 있어 순국열사들을 생각하는 애국하는 달이다. 오늘 따라 14년 전 헤이그에서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미국 와서 모처럼 아이들로부터 해방이 되어 남편과 둘이 홀가분하게 어디든지 떠나려던 때 마침 네덜란드에 사는 남편의 친구 이기항(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회장)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준 열사의 기념사업회에 이준 열사 박물관 건립기념 및 열사의 순국 86주기 기념식에 조시 낭송을 해달라는 초청이 왔었다.
우리 부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하고 시를 준비하고 때 맞춰 네덜란드로 갔다. 그때 사학자 현지인 여교수의 안내로 본국 KBS 특별 취재팀과 같이 이준 열사가 헤이그 역에 도착해서 숨을 거둔 모텔까지 열사의 발자취를 따라 행진을 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고종 황제의 친시도 보았는데 그 붉은 옥새 자국이 선혈들의 피같이 선명했었다. 열사의 묘지도 참배했고(현재는 국립묘지에 안장) 당시 조선인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민국 평화회의가 열렸던 국제 재판소에도 들어가 보았다.
나라를 빼앗기고 어느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고종 황제의 친서를 품고 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국제 고아로 세계 평화회의장을 남몰래 서성이며 통분했을 열사를 생각하며 설움에 복받쳐 울고 또 울었다. 열사가 묵었던 작고 허름한 당구장을 이준 기념회에서 우여곡절 끝에 구입해서 그 건물에 태극기를 꽂으며 우리들은 또 오열했다.
그렇게 며칠 슬픔에 잠겼다가 추모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헤이그 시장을 위시해서 네덜란드 고위 공직자들, 현지 교민들과 본국 KBS 취재팀 등, 유럽 각처에서 온 수백명의 교민들 모두 숨소리조차 하나가 된 엄숙한 추모식장에서 나는 조시를 낭송하며 울먹였고 끝내 식장은 흐느낌으로 그득했다.
열사의 기일마다 현지 신문에 기고된다는 열사에 관한 그 날 에세이에서 “하나님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라는 부르짖음이 열사의 마지막 유언이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며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추모식 전날 우리가 묵고 있던 호텔에서 가까운 안네의 집을 들렀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도 세계 각처에서 온 유대계 젊은이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작은 다락방에서 나치군들 몰래 기록한 ‘안네의 일기’와 낡은 사진들과 빛바랜 신문기사 쪽지들이 전시된 초라한 박물관인데도 유대인의 후세들은 그 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암스테르담 시내나 역 앞, 가까운 관광지에서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과 배낭을 멘 한국 대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암스테르담에서 불과 20여분 거리에 헤이그에서 거행되는 열사의 추모식에 참석할 의사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나를 이상한 아줌마라는 듯 쳐다보았다. 안네의 집에서 울먹이는 유대인 후세들과는 달랐다.
하긴 요즘 본국에 요상한 열사들이 좀 많은가! 올해가 이준 열사의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참에 네덜란드를 여행할 때 풍차만 보지 말고 헤이그에 있는 이준 박물관도 참관해 달라 부탁한다.
눈은 사람들의 욕망을 낚는 바늘과 같다. 남은 생애 무엇을 보며 살겠는가!
<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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