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창문을 열면서 오페라 나비부인중 ‘어떤 개인 날’을 부르는 소프라노 흉내를 내며 소리치고 싶었다. 15년 전 오늘도 상쾌하고 화사한 봄 날씨여서 그 봄의 유혹을 참지 못해 옷장에서 하늘하늘한 치마를 꺼내놓고 이웃에 사는 친구를 부르려던 찰라 한국일보에서 전화가 왔었다.
새로 시리즈로 연재될 ‘우리들의 삶’이란 칼럼 오프닝에 김하태 박사님(전 연세대학교 신과 대학장)과 같이 대담자로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담 장소가 내가 좋아하는 데소칸소 가든이라는 말을 듣고 얼른 대답을 했다.
그 며칠 후 약속대로 오색 꽃이 만발한 낙원 같은 데소칸소 가든 풀밭에서 김하태 박사님과 마주앉아 ‘우리들의 삶’에 관해 사회자의 질문을 받으며 우리 이민자들의 더 나은 미래에 대해 진지한 애기를 나눴다. 누군가가 우리 이민자들의 다양한 생활들을 정리해 볼 만한 때라 생각했었는데 마침 한국일보에서 시의적절한 기획을 한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타인의 삶을 보면서도 배우고 깨닫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만으로 배우고 깨닫게 되니 그만큼 힘들고 늦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날 날씨며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낙원의 길목’이라는 소설 제목까지 덤으로 챙겨 와서 소설을 쓰며 사진은 어떻게 나올까 하며 그 신문기사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청천벽력인가! 4·29폭동이 일어나 온통 불바다, 연기, 파괴, 죽음, 아비규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사진들과 한글사전에서 참혹한 단어는 다 찾아내어 쓴 듯한 기사들만 연일 신문 지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아닌가.
낙원 같은 데소칸소 가든에서의 우리들의 대담 장면이야말로 폭풍전의 고요였던 것이다. 정말로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을 또 한 번 절실히 깨달았다.
한동안 그렇게 우울하게 지내면서 나는 “이런 경황에 그 화사한 사진을 낼 수 있을까” 하고 염려했는데 폭동 5일후인 5월3일자 신문에 김하태 박사와 내가 꽃밭에서 화사하게 웃는 큰 사진과 함께 ‘우리들의 삶’ 시리즈 기사가 실리면서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그때 너무 참담한 일을 당해서 마음 놓고 웃는 것조차 죄스러워했는데 과연 그 사진을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마음 조였다. 독자들이 웃음을 잃고 우울증에 걸려 있을 것 같아 내 자신 신문 대하기조차 두려웠는데 많은 분들이 아름다운 공원에서의 환한 웃음과 더불어 이민자들이 꼭 알아야 할 충실한 기사 내용 때문에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해 안도했다.
그렇게 시작한 ‘우리들의 삶’ 시리즈는 장장 5년여간 생생한 현장감 넘치는 글로 독자들의 흉금을 울리며 절찬리에 연재되었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면 그 때 일을 생각하곤 했던 나는 당시 일을 떠올려 글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또 이게 웬 일인가. 아름다운 봄 날 편안한 마음으로 원고를 쓰기 쓰고 있는데 버지니아텍 참사 소식이 들려왔다. 게다가 용의자가 한국청년이라니…. 그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며 그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가호가 늘 같이 하시기를 기원한다.
얼마전 한국과 일본, 대만을 다녀왔다. 아름다운 봄 경치를 기대했지만 서울은 황사가, 대만은 지루한 장마 비 후의 끈끈한 습기, 그리고 도쿄도 비바람이 불어 활짝 핀 벚꽃을 사정없이 휩쓸어갔다. 그 뿐인가 내가 도착하던 날 LA 에도 바람이 불어 곳곳이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들이 뽑혀 나갔다고 했다. 사는 일이 꼭 이런 날씨같이 변화무상하고 불가항력적이다.
슬픔과 기쁨, 순탄함과 역경도, 행복과 불행, 있음과 없음이 모두를 처연하게 맞을 수밖에… .
인생살이란 순간의 행복을 위해 끝없는 고통을 겪으며 내일에 도전하는 일인 것을.
15년 전 나와 대담을 같이 하셨던 김하태 박사님께서도 지난달 삶을 마무리하시고 천국으로 가셨다. 15년은 짧고도 긴 세월이다. 정말 만감이 교차되는 날이다. 그래도 내일은 하나님께 의탁하고 15년 전 오늘처럼 환하게 이 봄을 보냈으면 좋겠다.
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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