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공복에 냉수 한 컵을 마시는 습성에 따라 부엌에 들어가 보면 가끔 빈 그릇들이 볼썽사납게 싱크대 안에 들어 있을 때가 있다. 며느리는 이미 출근했고 아내는 걷기운동을 나가고 있어 설거지를 내가 한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양푼에 담긴 그릇들을 하나하나 비누질하고 흐르는 물에 손바닥으로 씻어내면 매끄럽고 부드러운 기운이 가슴에 와 닿아 나이든 처에게 보시하는 기쁨이 아침 빈 마음을 채워 준다.
손자들을 돌보기 위해 큰애 집에 들어와 살기로 한 것은 내 고집이었다. 그러나 부엌일은 절로 아내의 일이 되었고 고혈압과 당뇨병 환자인 아내는 따로 현미밥을 해먹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며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이중의 고생을 하게 됐다. 자신의 지병에 지극히 민감했던 아내는 늘그막에는 둘만이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것이 내 불찰이었다.
더구나 난데없이 오십견이란 통증에 시달리면서 아내는 마치 인생의 절벽 앞에 선 듯 좌절감을 푸념했다. 40여년이란 긴 세월을 곁에 두고 살아오면서도 아내는 자신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한 남편이 남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대저 한국 여성들은 여자라는 숙명성 때문에 딸과 아들,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자식들, 며느리와 시어머니, 친정과 시집, 여자와 남자라는 크고 작은 인연을 고리로 한 인생을 산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남편과 자식들의 이기와 배덕이 여심을 울리고 깊은 상처를 주곤 한다.
아내는 오십견통을 앓고 난 뒤 그릇을 떨어뜨리거나 깜박하여 오븐 불을 끄지 않을 때가 잦고 또 나는 난청증으로 아내의 통역 없이는 식구들의 말이나 드라마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아내가 부엌에 있을 때면 나는 무시로 부엌을 드나들며 아내의 실수를 점검하고 도우면서 서로의 보완을 통해 일체감을 느낀다. 신체기능이 노화돼 활동력이 저하되고 고장이 자주 나면서 부부가 얼마나 소중한 관계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렵지만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거기를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는 사람은 배우자 밖에 없다. 아내는 존중되어야 하고 어머니는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남진식 / 사이프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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