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6월 연방의회 레이번 회관에서 개최된 ‘정신대 문제 관련 역사자료 전시회’는 정신대문제를 미 연방의회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한 계기가 되었다.
전시회 일정이 공표되자 일본 정부는 미 의회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방해공작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전시회 날짜는 다가오고 있는데 일본의 끈질긴 로비로 의회 전시관장은 전시허가를 기피하면서 우리들을 곤경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산지사방으로 뛰어다니던 그때, 뜻밖의 희소식이 날아왔다. 당시 하원의장인 깅그리치 의원이 전시회 승낙을 하여준 것이었다. 어찌하여 깅그리치 의장이 우리의 전시회를 허락하였을까?
사연은 1년 전인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신대문제 미 의회 입성을 목표로 동분서주하다 선교사 부인인 제인 하베이로부터 자신이 근무하는 미 감리교 건물을 쓰라는 권고를 받고 전시회를 열었다. 그 건물은 연방의회 후문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옆에는 연방대법원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연방의회로 통하는 절호의 디딤돌이었다.
깅그리치 하원의장의 개인 사무실과 여러 의원 사무실이 그 건물 안에 있었고 고어 부통령 부모의 워싱턴 거처가 또한 그 건물 내에 있었던 곳으로 의원들과 많은 정치인들의 출입이 빈번한 장소였다.
수백 장의 정신대 관련 사진으로 전시실을 꽉 채우고 장내 중앙에 TV를 장치하여 ‘정신대’ 비디오를 하루 종일 틀었다. 수학여행 온 국내외 다수 학생들이 정신대 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 희생자 할머니들의 비참한 체험담을 비디오로 들으면서 얼굴을 가리고 TV 앞에서 흐느끼던 여학생들의 모습을 분명히 깅그리치 의장도 보았을 것이다. 그 건물 로비에 배치하였던 방명록에 큰 글씨로 서명을 하였던 분이 깅그리치 의장이었으니까.
깅그리치 의장이 전시개막 허락 서명을 한 것은 개막 열흘을 앞둔 1996년 5월22일, 바로 나의 생일날이기도 하였으니 어찌 이보다 더 소중한 생일 선물이 있었으랴.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또 하나의 귀한 선물을 가슴에 안게 되었다. 2000년 9월20일 연방의회 레이번 회관에서였다. 정신대 희생자중 생존자 10명을 초대하여 인권상 시상식(Year 2000 Remembrance: Women of Dignity and Honor)을 개최한 식장에서였다. 희생자 전원을 모시지는 못하였지만 특별히 일본군에게 끌려가서 꽃 같은 인생을 전쟁터에 날려 보낸 수십만 명의 영혼들을 그날 모두 모시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래서 인권상 수상자 열 명이 앉을 곳에 또 하나의 자리를 마련하였었다. 흰색 커버를 씌운 큰 의자 하나를 한 가운데 자리 잡게 하고, 앉을 사람이 없는 그 빈 의자 위에는 대신 노랑 장미 한아름을 고이 모셨다. 바로 희생자 전원의 영혼을 모신 상징적 자리였던 것이다.
행사가 끝날 무렵 현 하원의장인 낸시 펠로시 의원이 “늦어서 죄송하다”면서 뛰어 들어왔다. 펠로시 의원과 희생자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빙빙 돌면서 기뻐하던 장면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인권은 민족이 문제가 아니었다.
행사가 끝나고 누군가가 그 노랑 장미다발을 내 가슴에 안겨주었다. 나는 그 장미꽃을 꽈악 껴안았다. 마치 수십만의 정신대 희생자 언니들의 영혼을 내 품에 안듯이. ‘성’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에 끌려간 소녀들, 시집을 꿈꾸며 삶의 희망과 꿈에 푸르렀던 어린 아가씨들, 저 먼 동남아 전쟁터에서 산산이 흩어진 혼이 되어 고향을 찾아 헤매던 그 영혼들. 그들이 말 없는 노랑 장미가 되어 그리던 평화와 자유의 천사가 되었던 것 같다.
이동우 / 전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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