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K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캐시어의 말을 믿지 않고 거스름돈을 덜 받았다고 고집하다가 나의 실수임이 드러나서 정중하게 사과한, 지금 생각해도 낯이 뜨거워지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그 캐시어를 신뢰하지 않은데 있었다.
현대를 ‘불신의 시대’라고 흔히 말하는데, 삶을 나누면서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은 우리를 긴장하고 피곤하게 한다. 미국생활을 오래하며 느낀 것이 많지만 그중 하나는 그래도 아직은 미국의 사회구조가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세운 조상들의 건국이념이 되었던 기독교 정신이 아직도 사회 체제에 많이 묻어있는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민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자동차 보험을 들 때 전화로 모든 질문과 답을 하고, 운전경력을 비롯하여 모든 대답을 보험회사에서 다 그대로 믿고 받아들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은 이것이 별 이상할 것이 없지만, 미국 생활 초기에는 신기하게 느껴졌으니 나에게도 불신의 풍조가 익숙했었나 보다. 또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지갑 도난 사건인데, 그 지갑에는 현금인출 카드와 비밀 번호가 같이 들어있었다. 이 사실을 다음날에야 알고 보니 벌써 이틀에 걸쳐 600불(하루 인출 최대 금액이 300불)을 꺼내 갔음이 확인되었다. 물론 경찰에 도난신고는 했지만 비밀번호를 지갑에 둔 것은 나의 실수이며 또 내가 인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인출해 갔다는 증거도 댈 수 없으므로 은행에 신고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직장 동료들이 밑져야 본전이라고 강권하여 신고하니 벌금 50불을 제외한 550불을 되돌려줘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 기억이 있다.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믿은 탓이다. 만약 한국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다면 은행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한 번은 매형이 낚시터에서 무인 주차료 기계에 주차료를 넣고 주차증을 받은 후 자동차에 잘 보이도록 놓지 않아 주차증이 없다고 적지 않은 벌금 고지서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영어가 서툰 매형은 나에게 관계기관에 전화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벌금을 면제받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만일 주차증을 증거로 보내겠다고 해도 그 주차증이 본인 것인지, 남이 주차장을 떠나며 버린 것을 주운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기에 전화 거나마나 안 될 일이라고 매형을 설득했으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어 전화를 했다. 놀란 것은 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그 주차증을 보내오면 벌금을 면제해주겠다고 했다. 그분들이 나의 말을 믿지 않으리라고 의심한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물론 타인의 신뢰를 악용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령 손해를 가끔 보더라도 서로 좀 더 신뢰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이 자기를 진정 믿어 줄 때 책임을 느끼며 더욱 신뢰받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부족한 점이 많은 인간들인데 비록 좀 불신할만한 근거가 있더라고 서로 간에, 특히 부부간에, 또한 부모와 자식 간에 진정 상대를 믿어주고 참고 기다릴 때 결국은 그 믿음의 기대대로 바뀌리라 생각된다.
한국의 인기 작가 최인호 씨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그분의 어머니는 신식 교육을 받지 않으시고 교육 방식도 투철한 분이 아니셨지만 그분은 자식들을 그냥 믿으셨다고 말한다. 학자금 마련이 어려운 형편에 그가 대학 1학년 때 낙제를 해서 1년을 더 다녀야 할 때도, 자식들의 시험 점수가 엉망인 때도, 대학 다닐 때 결혼하겠다고 해도 야단하지 않고 자식들을 그냥 믿었고, 그 믿음이 가정교육의 기본 철학이었다 한다. 그는 이 어머니의 믿음 때문에 여섯 형제들이 잘 성장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본인도 이러한 현명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를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자로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을 믿고, 비록 현재 못마땅한 점이 많지만 잘 되리라는 꿈을 꾸며, 오늘도 자식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믿어주기 위해 기도의 끈을 단단히 붙잡는다.
박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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