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의 아픈 현실 코믹하게 풀어내
‘사람 냄새’ 나는 연기·감칠 맛 대사 일품
TV와 영화와 인터넷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우리가 연극을 보는 재미는 그 속에 ‘진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진짜사람이 내 앞에서 침 튀기며 연기하고, 마이크 없이 울려 나오는 육성을 듣고, 때론 그들의 땀 냄새도 맡게 되는 인터액션. 바로 그 현장성과 일회성에 매료되는 탓이다. 바로 그 현장성 때문에 우리는 매끄럽지 않은 공연에도 관대해지고, 혹여 가끔 튀어나오는 실수도 웃어넘길 수 있으며, 여하한 상황에서도 다같이 몰두할 수밖에 없는 무대, 그것이 바로 연극이다.
극단 LA가 비전아트홀에서 이달 말까지 공연하는 ‘김치국씨 환장하다’(장소현 희곡, 김유연 연출)는 그러한 연극의 매력에 오랜만에 흠뻑 젖어볼 수 있는 코믹 풍자극이다. 10년전 한국에서 공연되어 여기저기서 상도 많이 받고 좋은 평도 많이 받은 작품인데, ‘미주한인토박이’라 할 수 있는 장소현씨 작품이 LA 무대에 오르기는 처음이라니, 그도 참 의외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빛나는 극본 때문에 봐야 할 이유가 있다. 제목이 조금 질펀하여 ‘그저 그런 코미디 풍자극인가’했던 선입견이 보기좋게 무너진다. 기발한 착상에 스마트한 스토리 구성, 입담좋은 대사들이 결말까지 관객을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고 극을 스피디하게 끌고 간다.
대강의 스토리는 이렇다. “한국전쟁 직후 남하해 온갖 고생을 하며 김밥집으로 자수성가한 김치국씨. 어느 날 신문을 읽다가 자신이 18억이라는 큰돈을 북한동포 돕기를 위해 적십자사에 기증했다는 대문짝만한 기사를 보게 된다. 지독한 자린고비인 김치국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통장에서 전 재산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에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그때 느닷없이 들이닥친 방송국 기자들. 김씨를 일약 시민의 우상으로 선전한다. 그날 밤 김치국씨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심야토크쇼에 출연하여 자화자찬 소감을 떠들어대는 것을 보게 된다. 황당한 김치국은 그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부인하는데 더 환장할 일은 수사기관에서 그를 남파 공작원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자칭 김치국이라는 제3의 인물이 체포되고 둘은 대질심문하게 되지만 제3의 인물은 자기가 진짜 김치국이고 오히려 당신은 가짜라고 큰소리친다. 그리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힐 모종의 대결이 시작된다…”
남북 분단의 현실을 이렇게나 재치있고 코믹하게 풀어낸 작가의 창조력에 경의를 표한다.
극단 LA의 배우들은 모두 너무 열심히 연기하였다. 다들 너무도 열심히 하기 때문에 조금 힘을 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내역의 고영주씨, 처음엔 좀 오버하는 것 같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감칠 맛나는 사투리 대사로 관객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형사역의 최준서씨도 현실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주인공 김치국 역의 변영우씨, 여기자 강소연씨, 그리고 방향, 정경숙, 박영훈씨 모두 좋은 앙상블 연기를 보여준다. 가끔 튀어나와 관능적인 몸매로 섹시 댄스를 추며 관객의 눈을 홀리는 아가씨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배경이나 소품이 어설프고, 장면에서 장면으로 넘어가는 이음새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 등은 척박한 이곳 연극환경에서 굳이 흠으로 잡아서는 안 될 것들이라 거론하지 말기로 한다. 다만, 매우 중요한 끝 장면을 확 반전시키지 않고 조금 맥 빠지게 처리한 점이 좀 안타깝다.
공연은 오는 30일까지 매주 목, 금, 토, 일요일 오후 7시30분에 열린다. 많이들 보러가서 몇 달동안 산고를 치른 김유연 연출가와 스태프들을 격려해 주길 당부한다. 티켓 가격은 25달러인데 10달러 디스카운트 카드를 쉽게 구할 수 있다.
비전 아트홀 주소는 505 S. Virgil Ave. LA. 문의 (323)864-5959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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