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
고영민 (1968~) ‘나무 한 권의 낭독’ 전문
속독으로 책장을 넘기는 바람의 모습. 서녘 하늘이 붉은 것도 그냥 붉은 것이 아니라 그 감동으로 붉다. 발밑에 떨어진 낙엽조차도 하도 읽어대는 바람에 떨어진 낱장들이고. 결국 페이지들이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지만, 걱정은 없다. 바람이 암기했을 것이므로. 외웠던 것을 천천히 들려주는 겨울바람의 입술이 파랗지만 따뜻하게 보이고 있다.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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