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평소처럼 컴퓨터로 주말 연속극을 보려는데 ‘다시보기’의 날짜 끝수가 새달 초하루를 나타내는 ‘01’이라 되어 있었다. 아무리 빨라도 20며칠 정도 밖에는 안 됐을 거라 자신하며 표시가 잘못 되었구나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새달로 접어든 게 확실해졌고, 그것도 여느 달과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는 12월이라는 ‘황혼달’로 들어선 것이었다. 더군다나 올해는 특히 ‘황혼달’이라는 의미 외에도 한국 대통령 선거라는 시대적 사건을 안고 있는 12월인지라 더욱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막판에 무슨 일이 어찌 벌어지려나…”
역시 막판답게 시시각각으로 기상천외한 소식들이 매일 한국의 뉴스를 장식하고 있고 인터넷 덕분으로 미국에서도 지구 저편 일들을 실시간으로 생동감 있게 접하고 있다. 정보 찾기가 주업무인 내 직업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보이는 한 네티즌은 2000년 당시 BBK 관련 기사들을 찾아내 심층 분석까지 하여 올려놓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 나름대로의 증거와 논리를 펼치며 인터넷에 쏟아져 나오는 분분한 의견들이 이제는 재미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혼란스럽다.
그리고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화가 나고 짜증스럽기만 하고 말이다. ‘도대체 뭐가 진실인 거야!’ ‘사기’ ‘무혐의’ ‘음모’ 등의 단어들이 너무 위력적으로 난무해서 도무지 대선공약이라는 게 있는지, 필요한 건지조차도 모르겠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나만 정신없는 게 아닌가 보다.
정신이 없는 게 지극히 당연할지 모를 이 대선의 소용돌이를 접하면 접할수록 얼마 전 친구에게서 들은 ‘시냇물 철학’이 자꾸 생각이 난다. ‘길이 열리는 만큼 졸 졸 졸’ 아무리 대선이라도 그렇지, 해도 너무하게 혼란스럽고 억지스러운 목소리들이 나를 더욱 이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이리라.
조용히 눈을 감고 모든 자연과 벗하며 열려진 길을 따라 즐겁게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을 상상해 본다. ‘졸 졸 졸’ 경직되었던 얼굴의 근육이 절로 펴지고 입가에 미소가 번져간다. 그리고 구겨지고 무거웠던 가슴도 쫙 펴지며 가뿐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 안에 담긴 마음도 절로 예뻐지는 것 같고, 머리도 덩달아 맑아지고 말이다. 어느덧 ‘시냇물 명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명상 덕분에 나는 흥미진진한 체험을 하기도 했다. 얼마 전 단식을 마치고서의 일이다. 단식 중 가장 어려운 유혹이 빵과 술이라 할 정도로 나는 이들 음식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내 체질에 해가 된다는 한의사의 말과 이를 입증하는 내 몸의 반응 덕분에 밀가루 음식, 즉 빵과 국수는 어렵지 않게 멀리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술에 대해서만은 끊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즐기는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술을 들이키며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짜릿한 느낌과 그 후의 나른함을 즐기는 대신 내 몸이 알콜로 인해 탁해진다는 묘한 거부반응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단식기간 동안 행한 이 명상 덕분에 어느새 나 스스로를 시냇물과 동일시하게 된 것일까?
술을 마시면서 맑디맑은 시냇물을 술로 오염시킨다는 연상을 하게 될 줄이야… 그 맑은 물로 열려진 길을 따라가는 자연스러움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게 될 줄이야…
눈을 뜨니 다시 대선 뉴스가 여기저기서 눈길을 끈다. 명상 덕분인지 정신 사납다 여겨지던 얘기들이 그다지 방해가 되지를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문득 유권자들을 생각하니 그들이 지고 있을 부담이 내 가슴에도 묵직하게 느껴졌다.
부디 한국의 유권자들이 판단력에 생기를 불어넣는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하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맑아진 마음과 머리로 차후 5년 후회하지 않을, 아니 자랑스럽게 여길 현명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기억에 남을 12월이 되기를 바라본다.
김선윤
USC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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