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원
베벌리힐스 도서관 사서
딸아이가 크리스마스 때 온다는 소식과 함께 여행 일정을 이메일로 보내 왔다. 일에 밀려 티케팅을 미루고 있었더니 값이 너무 비싸져서 회사 일로 출장 오는 것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때문에 집에 와 있는 동안에도 몇 곳에 방문도 해야 하고 사람도 만나야 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가능한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낼 것이고, 엄마랑은 함께 스파에도 가고 마사지도 받자고 했다. 고마운 말이다. 그런데 딸아이의 바쁜 일정이 내게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30년 이상 일해 오던 직장에서 이 연말에 은퇴하는 것으로 공고해 놓아 나도 무척 바쁘기 때문이다.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과 사무실 정리, 초대 점심, 연말파티 등으로 시간이 많이 모자라는 형편이다. 그래서 은퇴 날까지 휴가를 하지 못한다.
시간이여, 시간이여, 인색한 그대여. 밖에서 일하는 어머니들은 명절에 자녀들이 집에 오면 반갑고 또 미안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평소에 해먹이고 싶은 것도 많고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고 다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아이들의 스케줄에 맞추어 휴가를 내어 함께 스키를 타며 겨울 명절을 즐겼다.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각기 제 직장을 갖고 제 살림을 차리게 되자 함께 하는 휴가의 질서는 무너졌다. 그래도 딸아이만은 연말연시에 꼭 우리를 찾아 먼 길을 날아오고 있다. 딸은 이번 휴가에 스키장에 가서 스노보드를 타고 싶다고 했지만 우리는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휴가를 3일쯤 일찍 끝내고 돌아가서 제 친구들과 함께 눈산에 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내년에도 딸이 스노보드 얘기를 하면, 글쎄, 그때는 심각하게 함께 가는 쪽으로 고려해 볼 것이다. 4, 5년 전에 아이들 없이 우리끼리 스키를 타러간 적이 있다. 며칠을 잘 놀다가 점점 용감해진 우리는 겁 없이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찔했다. 아이들과 함께도 감히 오르지 않았던 절벽의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흰 등성이는, 스키 도사들이 만들어 놓은 모굴들 때문에 마치 공동묘지가 수직으로 드러누워 있는 듯했다. 올라갔으니 어떻게든 내려와야 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느릿느릿한 속도로 지그재그로 벌벌 거리며 내려오려니 산등성이는 왜 그리도 길던지. 다시는 맴모스 스키장에서 제일 높은 그 정상 근처에는 가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때 이후로 스키는 휴가 메뉴에서 제외되었다. 언젠가 다시 눈산을 찾으면 산 중턱 이상엔 절대로 오르지 않을 것이다. 어른이 된 아이들은 우리와 놀지 않겠지만 그 아이들의 아이들은 우리와 놀아줄 것이다. 깔깔 대면서 함께 눈을 탈 것이다. 그런 행복한 시간들을 상상하면 세월 가는 것도,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주 미세한 소리도, 아무런 작은 움직임도 없이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의 정확함이 잔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시간은 공평하고 친절하다.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키 큰 사람, 작은 사람, 건강한 사람, 아픈 사람, 노인, 아이에게, 모두 평등하게 찾아오고 동일한 속도로 지나간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초음속으로 달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한해가 마지막 시각으로 저물어가고 있고, 지나간 모든 것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을 달고 뒷걸음질할 것이다. 지극히 제한된 시간 안에서 딸아이와 좋은 기억들을 만들 수 있어야겠는데, 두고 볼 일이다. 밤늦게 도착할 아이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집 앞의 불빛을 보고, 아아, 홈, 스위트 홈, 하겠지. 그래 주었으면 행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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