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미국생활이 한국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더 길어졌다. 그래서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도 많이 미국화해 모국방문 때 같은 우리말을 쓰면서도 의사전달이나 행동거지에 어색한 때가 있었고 가끔 한국 사람들이 예의라며 지키는 내숭 때문에 거리감을 느낀 적도 많았다.
최근 몇 년은 모국 방문 때마다 꼭 일본을 다녀왔었는데 장단점 양단간에 일본은 일본다운데 이상하게도 한국 사람과 한국은 한국다운 특색이 점점 없어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그 의문을 풀게 되었다.
이번 모국방문 길에 윤동주 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했고 시상식 후 연이어 공연된 뮤지컬 윤동주를 감상했다.
그곳에서 문인들뿐 아니라 각계 인사들도 많이 만났는데 그중 재일동포 2세 사업가 한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분도 우리 아들 같이 ‘벽에 땀이 난다’(벽이 젖었다) 식으로 우리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정신이 투철해서 윤동주 문학상 수상자들을 만나고 윤동주 뮤지컬을 감상한 뒤 “지금까지 동남아시아를 휘돌아다니면서 사업가들과 돈 버는 얘기만 했었는데 오늘 저녁이야말로 내 일생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업그레이드된 날”이라며 앞으로 윤동주 사업을 적극 돕겠다는 약속을 하며 글썽였다.
그 밤 그 행사장에서 물질만능주의의 현실을 비집고 문학의 존재가치가 잠시나마 인정받았다고나 할까?
그리고 다음날 서울 남산에 있는 문학의 집(옛날 중앙정보부가 있던 곳)에서 열렸던 시 낭송대회에 참석했다. 많은 참가자들과 시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참석한 열띤 경연대회였다.
참가자들은 각자 애송시 한 수를 암송하고 심사위원들이 즉석에서 주는 명시들을 낭송하며 실력을 겨루었다. 오로지 우리말로만 표현할 수 있는 작품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던 그 몸서리치는 가난도 시 속에서는 아름다웠고, 만남의 기쁨과 뼈 저리는 이별도, 나라를 빼앗겼던 원통함도,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용서할 수 없는 미움도, 인생의 허망함도, 자연의 섭리도, 희망과 절망, 사나이들의 깊은 고뇌와 아버지들의 긴 한숨도, 어머니들의 눈물도, 희생으로 나누는 우정도, 이웃을 감싸 안은 따뜻한 마음도 모두 모두 시 속에서는 똑같이 아름다웠고 그 시들 속에서는 삶과 죽음 행, 불행도 구별되어지지 않았다. 이틀 간 세상을 잊고 시인들과 시를 사랑하는 이들과 시에 젖었던 그 시간은 너무 행복했었다.
새봄이 되면 우리도 아름다운 모국어로 청청한 목소리 다듬어 산이 울리도록 시 낭송대회를 한번 열어 보면 어떨까!
문학에 빠져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되지만 문학작품들을 인생의 안내자로 삼는다면 같이 웃고 울며 마음의 행로에 좋은 길벗이 될 것이다.
사업현장에서 고객들을 대하다 돌발사항이 생겨 흥분하면 나는 평소 하던 영어마저 막힐 때가 있다. 그리고 한인 친구들과 오래 수다를 떨고 난 다음이나 명절 때 일가친척들과 며칠 같이 지나다보면 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잠시 뇌에서 영어 테입이 끊어지곤 한다.
그렇다. 제아무리 영어를 잘 해도 위급한 일을 당할 때 “엄마”를 부르는 사람은 모국어 사용자이고 뚝배기에 펄펄 끓는 해장국을 먹으며 “시원하다”라는 말뜻을 안다면 모국어의 멋을 아는 사람이다.
모국어는 혼이다. 그래서 한국이 한국같이 보여 지지 않아도 그 땅에 아름다운 우리말이 살아있는 한 그 땅은 모국이고 한글은 우리들의 모국어이다.
‘낮은 음표보다 저 낮은 바람이/ 산 그림자를 집적이고/ 스쳐간 날들이 무겁게 어깨위로 내려앉는다/ 낡은 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 제자리표 산울림으로 퍼지고/흔적마저 가셔야 하는/ 무거운 고요/ 숨기고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것을 품으며“<나의 시 ‘그믐’중에서>
아! 저무는 저 해 꼬리를 부여잡고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랴!
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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