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은퇴한 사람을 ‘백수’라 부르고, 나처럼 갓 은퇴한 사람은 ‘화려한 백수’로 불린다고 어떤 친구가 알려 주었다. 은퇴한 직후에는 갑자기 많아진 자유 시간과 목돈으로 받은 풍성한 퇴직금을 신나게 쓰면서 놀 수 있기 때문에, 화려하다, 는 수식어가 따라 간다고 친구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가끔 백수가 과로사를 하니까 너무 무리하게 놀지 말라고 친절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참 재미있다고, 하하하 웃었다.
은퇴한지 꼭 두 주일이 지났다. 습관이란 무서운 힘을 지닌 것을 매일 실감하고 있다. 여전히 아침이면 6시 정각에 눈이 떠지고, 출근 준비를 해야 될 것처럼 서두르게 된다. 아 참, 이럴 필요가 없는데, 천천히, 천천히, 릴랙스 하는 거야,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직 화려한 백수 노릇은 시작 못했고 사무실을 정리해서 실어 온 박스들도 그대로 두었다. 오랫동안 훈련 되어진 두뇌가 나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익수해 지는데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햇살이 쏟아지는 내 집 뒤뜰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루 종일 데스크 위에 놓아두고 마시던 커피에서는 그 향기를 맡을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일하는 틈틈이 마셨을 뿐이다. 점심 한번 하자, 면서 몇 년씩 미루어왔던 친구와 평일 한낮에 만나 소곤거리는 재미를 체험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급히 일어서야 될 이유 없는 점심식사는 참으로 생소한 경험이었다. 점심을 함께한 그 친구는 한 주일에 두세 번은 친구들과 만나 그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30년이면 몇 번의 점심이며 몇 시간의 친교인가? 그러고 보니 직장 밖에서 사귄 친구가 내게는 아주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약간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우정이란 것이 마음속에서도, 전화선 위에서도 자라겠지만 마주 앉아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더 크게, 더 빨리 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시간이 있을 때 함께 놀 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나는 다행히 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니까, 혼자서도 전혀 심심하지 않으니까, 하고 자기 위로를 해보았다. 그런 생각은 확실히 내 스스로를 위한 위로에 불과했다. 지금부터라도 친구를 사귀고 우정을 키우는 데 인색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이 화려한 백수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늘어났다.
지난 두 주일 동안 가장 좋다고 느낀 것은 러시아워를 피해서 외출하는 일이다. 30년 넘게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나는, 그만큼 긴 세월을 매일 같은 길로 출퇴근했었다. 8마일도 안 되는 도서관까지 가는데 40분을 소모하면서 아침마다 교통지옥을 뚫고 다녔다. 처음 10년은 20분이면 충분하던 것이, 30분으로 늘어나더니, 다시 40분으로 길어졌다. 그것도 사고가 없고 도로 사정이 좋을 때 일이다. 생산 현장으로 출근하거나 생산기술을 배우기 위해 학교로 가는 사람들을 태운 차들의 행렬은 매년 길어져 갔다. 이제 생산대열에서 소비대열로 자리를 옮긴 나는, 내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러, 공부하러 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 시간 동안은 길을 양보해야 된다고 믿는다. 생산은 빠르게, 소비는 느리게. 백수의 근사한 생각이다.
우리 집 앞으로 개를 데리고 걷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아침 일찍 한번, 저녁 으스름 때 한번, 하루 두 번씩 규칙적이다. 걷기에 좋은 동네에 살아서 부럽다고 한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동네사람들에게 손 흔들고 하이, 만 할뿐 그들의 집 앞을 걷지를 못했다. 그들이 걷는 시간에 나는 트래픽과 싸우고 있었다.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이웃들과도 좀 가까이 지낼 생각이다. 울타리를 사이로 한 이웃집 여자가 새해에는 커피 마시러 올 수 있겠느냐, 고 물었다. 올해는 확실하다고 대답했다. 케이크를 하나 구워서 방문할 계획이다. 나는 화려한 백수 생활을 이렇게 작은 일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송정원
전베벌리힐즈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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