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값
오랜만에 한가로운 아침을 보내면서 TV를 틀었다, 마땅히 볼 것도 없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드라마 한편을 보게 되었다. 장면은 어느 회사의 사무실이다. 직원들끼리 새로운 팀장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사내 결혼을 한 여자가, 다음 팀장은 당연히 본인의 남편이 될 것이라고 한껏 들떠서 이야기를 한다. 마주 앉아 있던 다른 직원이 이유가 뭐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남편이 이 팀에서 가장 오래 됐잖아” 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직원은 눈을 흘기며 “아니....간장, 된장도 아니고 오래되면 장땡 이예요?” 라며 한 마디 한다.
드라마의 대사를 듣는 순간 ‘간장 된장’ 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한다. 사람을 우리의 묵은 장맛과 비교한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잘 묵혀진 장맛만큼은 정말 좋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묵다’라는 말은 일정한 때를 지나 오래된 상태이거나 방이나 논 따위를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겼을 때 쓰이는 말이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묵혀 두거나 묵힌다는 말을 흔히 쓰고 있다. 유용한 것을 쓰지 않고 버려둔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 한편으로는 묵혀둔 장의 깊은 맛을 표현하기도 하니 우리말의 두 얼굴이 재미있다.
잘 묵은 된장은 일년 내내 그 구수한 맛 값을 우리의 밥상 위에서 톡톡히 해내고 있다. 된장이 스스로 뽐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맛이 그 묵은 값을 알아주는 것이다. 내가 내 나이만큼의 대접을 받으려면 거기에 걸 맞는 나이 값을 잘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 보다 더 크게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부끄러운 욕심도 들곤 한다. 배우면 배운 만큼, 가지면 가진 만큼 그리고 오래되면 오래된 만큼 그 값을 잘 해내며 살고 싶은데 내 모습은 그렇지가 못 한 것 같다.
드라마 속 그 남자는 결국 팀장이 될까? 곰삭지도 못한 채 그냥 묵어 버리기만 한 사람일까 아니면 정말 된장처럼 오랫동안 잘 묵어서 그 값을 해낼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그런데 그 젊은 여직원의 대사가 다시 생각난다. “ 아니, 간장 된장도 아니고 오래되면 장땡 이예요?” 라는 빈정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불현듯 나에게 손가락을 들이밀며“ 아니 그만큼 가졌으면 가진 값 좀 하세요!”라며 한마디 더 보탤 것만 같다. 점점 목덜미가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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