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 아일랜드 그릴의 쉬림프 에퍼타이저.
88년경에 베이빌에 새로운 곳이 생겼습니다. 바로 해변가에 새로운 빌딩이 지어지고 연회장을 겸한 새 레스토랑이 열렸습니다. 둥근 반달의 해안이 왼편으로 보이고 멀리 바다 쪽으로 불쑥 나온 부분에 우리 집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해가 지는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어서 그 곳에 가 저녁을 먹는데 지진 고기가 좁쌀 비슷하게 잔잔한 곡물(quinoa·퀴노아)이 푸른 야채 위에 얹혀 나왔고 고기 위에는 로즈마리(rosemary)라는 뻣뻣한 줄기에서 자라는 허브가 한개 꽂혀 나왔습니다. 요리를 편편하게 접시에 담지 않고 위로 올려서 서브하는 것이 그 당시에 막 시작한 때였습니다. 눈이 번쩍 뜨이게 세련된 모양이었습니다. 어머나 이런 곳이 우리 동네에 생기다니!하고 깜짝 놀랬습니다. 연한 고기에 모양내어 흘려 뿌린 소스를 찍어 먹으면서, 포크 사이로 간혹 떨어지는 퀴노아라는 새로운 곡물을 맛보면서 우리는 둘다 음식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뉴욕의 일류 레스토랑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남편을 두고 저는 당장 주방장을 찾아가 거기서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할 일이 없으면 좀이 쑤시는 사람인데 로즐린에 있는 파티 서비스에서 일을 그만 둔 후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굉장한 집이 더군다나 바로 우리 동네에 생겼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리차드 알렌(Richard Allen)이라는 그 영국인 주방장은 금방 저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딸이 초등학교 저학년이라 저는 아침에 일을 시작해서 점심에 서브할 것을 준비하고 점심때 손님을 치른 후에 집에 가도록 시간을 짰습니다. 딸의 학교가 끝날 때쯤에는 집에 있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제가 레스토랑에서 일을 한다고 하니 우리 집에서 난리가 났던 것은 말도 마셔요. 뭐, 식당에서 일을 해? 직업 중에 제일 천한 게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야 남편은 그런 저질의 일을 하면 자기의 체면이 깎인다고 야단이었고 딸도 엄마가 자기를 돌봐주지 않고 소홀히 할 계획이라도 세운 듯이 섭섭해 했습니다. 허지만 저는 요리에 신들리다시피 하였으니 더 배우고 싶은 욕망, 남보다 뛰어나게 잘하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아이 기르는 것을 소홀히 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얼마든지 그 시간을 이용할 수가 있다고 생각 했으니까요. 그렇게 재주 있는 요리사가 옆에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요. 배우고 싶은 욕망 외에도 저에게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여자라고 은근히 무시당하는 것도 싫거니와 숨을 쉴 용돈도 필요하였습니다. 빠듯하게 주는 생활비 외에 용돈이 필요할 때에 돈 달라는 말이 하기 싫어 독신 때 모아 두었던 돈을 매달 조금씩 꺼내 써서 그것이 거의 바닥이 나기 시작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보수는 창피할 만큼 적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일하는 대가도 제대로 못 받는다고 남편이 수도 없이 떠들어 대었습니다. 저는 배우고 싶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뉴욕에서 그럴 듯한 일자리를 얻으면 출퇴근으로 거의 3시간을 허비해야 하니 애가 학교도 가기 전에 벌써 집을 나가야 하고 저녁에 늦게 돌아오게 되거든요. 그러자면 집안일을 하고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딸을 돌봐 줄 사람을 구해야 하지요. 녹초가 되어 돌아오면 허겁지겁 저녁을 먹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어요? 아이의 숙제를 보아 주거나 혹은 자기 전까지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낼 마음의 여유가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었습니다.
딸이 태어난 후부터 자기가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미끄러졌다고 가끔 불평하는 남편이 둔갑을 해서 새 사람이 될 것도 아니고. 그것은 정말 일하는 모든 엄마들의 딜레마. 그리고 타는 월급에서 세금 낸 후에 일하는 여자에게 주는 돈,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쥐꼬리만큼 남는 것은 마찬가지. 그러니 옆에서 고시랑 거리는 소리를 묵살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주방장 리차드는 정말 너무나 기막히게 재주가 많은 요리사였습니다. 부엌의 일꾼들을 위하여 그의 요리법을 적은 책자에는 제에게 새로운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준비해야 하는 닭 국물 이라든지 야채의 맛이나 모양에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엌을 항상 아주 깨끗하게 치우도록 엄격하게 요구 했습니다. 어느 부엌이던 깨끗해야 하는 것이 당연 하지만 특히 식당의 부엌 이야 말로 깨끗해야 하지요.
텃새를 부리는 심술궂은 남자가 있어 골탕을 먹으면서도 저는 적어도 하루에 하나씩 배우리라 생각하고 누가 보건 말건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가장 열심인 일꾼으로 뽑히기까지 하였습니다. 실제 그렇게 레스토랑에서 일을 해 보면 요리가 보통 여자의 일인데 왜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개 남자인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닭 국물, 송아지 국물을 내는 큰 통이 무지하게 큰데 여자의 힘으로는 감당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움직이려 했더니 꿈쩍도 안하더라구요. 뿐만 아니라 뜨거운 스토브 앞에서 장시간 땀을 흘리며 서서 일하는 것은 정말로 중노동이랍니다. 저는 낑낑대며 들지도 못할 레몬 박스를 남자들은 그것을 아래에서 던지면 사다리 위에 선 사람이 받아서 선반에 올려놓는 것을 보았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더라구요. 그러니 레스토랑의 일은 남자가 많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여자들은 주로 씩씩한 팔힘을 요구하지 않는 페이스트리(후식 담당) 쉐프가 되는 수가 많지요.
샐러드에 들어가는 아티쵸크(artichoke)나 콩을 익히는데 전날 만들어 놓은 닭 국물로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맛이 있을지 상상 하실 수 있겠어요? 처음 보아 신기해 한 그 퀴노아도 닭 국물에 익힌 것이었습니다. 싼 레스토랑과 돈을 훨씬 더 내야 하는 고급 레스토랑
의 차이가 다 그런데 있는 것입니다. 벌써 재료값이 훨씬 더 들어가지 않습니까! 샐러드 드레싱에 들어갈 샬롯(shallot·양파 비슷하고 약간 적은 것)을 특별한 오븐에 넣고 약한 불에 오래 동안 구워서 단맛을 내었습니다.
많은 양의 버섯을 익힐 때에는 마늘, 오레가노(oregano·허브의 일종), 소금 후추 양념을 하고 기름을 뿌린 버섯을 철판에 펴서 오븐에 넣었습니다. 해물 파스타를 만들 때는 조개 국물이나 닭 국물을 썼고 굵은 고추 가루를 조금 뿌려 톡 쏘는 맛을 내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빡빡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닭고기 가슴 살 요리를 위해서는 고운 고춧가루와 밀가루를 묻혀 튀긴 양파를 먼저 준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붉은 빛이 도는 양파를 다져서 가슴 살 위에 씌운 후에 오븐에 넣어 구웠습니다. 살이 촉촉하게 익어 빡빡하지도 않고 얼마나 맛이 있는지! 걸어 들어가는 커다란 냉장고 안에는 맛있는 소스, 준비해 놓은 음식으로 꽉차 있었습니다. 하루에 두 세가지씩 배우는 것은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습니다. 요리 학원에서보다 배우는 게 더 많았을 뿐 아니라, 많은 양을 어떻게 효과 적으로, 또 어느 정도 까지 미리 준비 하는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그야 말로 이게 무슨 횡재야 하고 좋아할 만 하였습니다. 저녁에는 우리 식구들과 함께 가끔 거기 가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애써 준비하는 음식 맛이 어떤가 보아야지요.
그 해 여름에는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휴가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오스트리아의 살쯔부르그(Salzburg)로 포쉐(Porche)라는 아주 빠른 자동차 경주를 하러 갔을 때 딸만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휴가를 못 가는 것도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고 그저 너무나 기쁘게 그 레스토랑에 가서 매일 일을 하였습니다. 파인 아일랜드 그릴은 얼마 되지 않아 롱아일랜드에서 알아주는 레스토랑이 되었습니다. 점심, 저녁, 매일 손님이 꽉꽉 찼습니다. 음식 맛이 뛰어난데다가 경치가 그만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저녁에는 거의 200명이 넘게 손님이 와서 정신을 못 차리게 바빴습니다. 휴일에는 거의 삼백 명에 달했습니다. 또 위층에는 바가 있어 올라가서 술을 마시는 손님들로 꽉 찼구요. 모든 것이 활기있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크나 큰 일이 하나 터졌습니다.
재료값이 너무나 많이 든다고 주인이 불평을 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경치가 너무 좋아 아무래도 손님이 올 테니 재료값을 줄이라고 요구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집쟁이 리차드는 음식의 질을 낮추어 시시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들여 캘리포니아에서 거의 사오다시피 한 그 복 덩어리 주방장은 결국 그 레스토랑을 떠났습니다. 리차드는 뉴욕의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이전했습니다.
파인 아일랜드에는 새로운 주방장이 들어 왔습니다. 참 기막힌 것은 손님이 마치 썰물과 같이 씻겨 내려 가듯이 없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치 때문에 음식과 상관 없이 손님이 꼬일 것이라고 떵떵 거리며 장담하던 주인은 그 후 일 년 동안 4명인가 5명의 주방장을 바꾸고 뉴욕의 유명한 컨설팅 회사에 의뢰까지 하여 사업을 다시 일으키려 애를 썼습니다.
손님이 없는 날은 10명내지 15명이 겨우 오는 날도 있었거든요. 손님 수가 줄어들자 직원 수가 많이 줄어들었지요. 그래도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 치우는 사람, 서브하는 웨이터 등의 수가 손님의 수 보다 훨씬 많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리차드를 따라 갈 만한 주방장은 없었습니다. 천만 다행히 연회장을 이용하는 결혼식이라든가 큰 생일잔치는 가끔 있어 유지가 되었다고 생각 되었습니다. 일 년이 좀 지나서 리차드가 다시 가든 시티(Garden City)라는 롱아일랜드의 다른 고급 동네 호텔 레스토랑으로 이전 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왜 일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리차드에게 용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바닷가에 있는 우리 집을 보고 한 말 이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리차드 밑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이 제가 서양요리에 대한 기반을 닦고 후에 책을 쓰는데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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