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아파트에 살다가 처음으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조그만 마당이 딸린 집이다.
우리 네 식구는 처음으로 가져보는 마당에 심어진 늠름한 야자수며 무성한 고목 벤자민의 초록빛에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바로 창문 앞, 야자수 이파리에 앉아 아침잠을 깨우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까마귀도 신기하고, 빨간 칸나 꽃을 찾아드는 벌새의 날개 짓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나는 벌새가 좋아한다는 빨간 설탕물이 담긴 유리병과 갖가지 씨앗이 담긴 모이통을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다.
어느 틈엔가 한 마리, 두 마리씩 새들이 깃들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온 동네 새들이 다 날아드는 듯했다. 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자연이며 평화로운 세상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엄청나게 먹이를 쪼아대는 새떼들을 가만히 보노라니 흙바닥에 버려지는 먹이에 똥이 태반이었다. 게다가 어느 초저녁, 창문밖에는 새들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생쥐 모자까지 할끔거리는 게 아닌가. 솔직히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얼마 전에 재미있게 본 요리사 쥐가 나오는 애니매이션을 떠올리며 이번 기회에 제대로 쥐의 행태를 관찰해 볼 작정이었다.
처음엔 새들 눈을 피해 야금야금 조심스럽던 생쥐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대담해져 내 눈치도 아랑곳 하지 않더니, 이젠 집 차양을 들락거리며 내려와 아예 도망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그 모습에 질려 급기야 나는 떨어진 모이를 흙으로 덮어 버렸다. 흙을 들추면서까지 모이를 찾아먹던 억척스러운 생쥐모자는 결국 먹이통을 치우고 나서야 자취를 감추었다.
자연과 함께 하고 싶었던 평화로운 세상은 이렇게 3주 만에 끝이 났다.
난 내 보금자리의 한 구석을 생쥐 모자에게 내놓기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칠십 평생을 외롭게 살면서 추운 겨울날 자신의 흙집에 찾아온 배고픈 생쥐와 한 이불을 덮고 친구가 된 사람이 있다. <강아지 똥>을 쓴 동화작가 권정생이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 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그가 쓴 그림책 강아지 똥을 처음 만났다. 난 지금도 시골 분교 아이들과 읽었던 그 짧은 동화 한 편이 준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40여년을 안동의 가난한 시골 교회 종지기로 살았던 그는 어느 날, 처마 밑에 버려진 강아지똥이 비를 맞아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땅 속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서 노란 민들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저거다. 강아지똥처럼 저렇게 보잘 것 없는 것도 자신의 온몸을 녹여 한 생명을 꽃피우는구나. 그는 눈물을 흘리며 며칠 밤을 새워 강아지 똥 이야기를 썼다. 그가 쓴 첫 동화였다.
권정생은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일본에서 태어나 청소부인 아버지가 쓰레기 더미에서 찾은 동화를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또다시 한국 전쟁을 겪어야 했다. 전쟁과 전쟁의 상흔이 가져온 아픔은 우리 동화 문학사에 빛날 <몽실 언니>를 탄생시켰다.
지난 해, 자신이 살았던 다섯 평짜리 오두막마저도 허물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조탑리의 동네노인들은 세 번 놀랐다고 한다. 그저 새벽마다 교회 종이나 치며 홀로 사는 노인인 줄 알았는데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천 명의 조문객이 몰려와서 슬퍼하는 것에 놀랐고, 한 몸 뉘이면 돌아눕지도 못할 누추한 오두막에 살면서도 연간 수 천 만원이나 되는 인세수입이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평생 모은 10억 여원이 넘는 인세를 북한의 굶주리는 아이들과 전쟁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한 것에 또 한번 놀랐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과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에 연민과 사랑을 나누었던 권정생은 댓돌 위에 고무신 한 켤레 남기고 갔다.
이미경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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